■ What - 2000년 역사의 교황

 

초대 교황 베드로… 성경에 근거

후임자 ‘베드로의 후계자’ 권위

 

중세 황제에 ‘카노사의 굴욕’안긴

그레고리오 7세, 정치의 대가 평가

 

1300년경 교황권 세계정점 도달

부패·사치·세속화로 분열 시대

 

16세기 종교개혁後 각성 목소리

식스토 5세, 재정개혁 등 힘쏟아

 

20세기 진보·보수 변증법적 종합

프란치스코 진보성의 근간 이뤄

2014년 9월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미사를 집전하기 전 프란치스코(오른쪽) 교황이 베네딕토 16세 명예 교황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EPA 연합뉴스
2014년 9월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미사를 집전하기 전 프란치스코(오른쪽) 교황이 베네딕토 16세 명예 교황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EPA 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1936∼2025) 선종 후 새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와 하나의 독립국가인 바티칸 등 가톨릭 교회의 구성요소와 제도에 대한 관심이 높다. 특히, 선종한 교황은 ‘빈자의 성자’로 불리며 존경받았고, 종교를 넘어 인류의 평화를 설파한 영적 지도자였다. 전 세계적 추모 열기가 식지 않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가톨릭 교회 수장인 ‘교황’ 자체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도 커지고 있다. 교황 제도는 2000년 이상 존속하고 있으나, 모든 교황이 프란치스코와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한때 타락한 절대 권력이었고, 정치에 개입하며 분란을 조장했고, 교회의 세속화를 가속화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현대까지, 수많은 변화를 겪은 ‘교황의 역사’를 살펴본다.

◇베드로의 후계자…교황권의 잉태 = 교황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교황의 긴 직함 안에 힌트가 있다. ‘로마 교구의 교구장, 그리스도의 대리자,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 보편 교회의 최고 사제, 서방 교회의 총주교 (…) 바티칸 시국의 국가 원수’. 이 중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와 관련한 일화가 교황권 기원의 근거로 주로 제시된다. 예수가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마태오 복음서 16장 18∼19절)이라고 한 구절이다. 즉, 베드로는 초대 교황(64∼67)이고, 이후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권위를 인정받는다.

베드로 이후 서기 1000년까지는 교황권이 서서히 높아지는 시기였다. 그러나 초기 교황들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별로 많지 않다. 독일의 저명한 역사학자 호르스트 푸어만(1926∼2011)이 남긴 ‘교황의 역사’에 따르면, 이 시기 베드로의 뒤를 이어 누가 로마 공동체를 대표했는지조차 확실하게 말하기 어렵다. 다만, 점차 로마 주교 명단이 보완돼 교황 연대표가 등장했고, 초대 교회 시대를 파악하는 결정적 사료가 됐다.

교황권이 ‘잉태’되던 때. 교황권에 대한 정확한 지침을 내린 교황은 레오 1세(440∼461)였다. 그는 “교황은 베드로와 동일시될 수 있는 존재로서, 이에 상응하는 헌신을 요구할 수 있다”고 했다. 교황 수위권과 로마 교회의 사법권을 주장한 레오 1세의 치세 20여 년간 로마의 주교좌는 그 권력과 명성이 엄청나게 성장했고, 레오 1세는 ‘대교황’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얼마 전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당시에도 수도자의 순종을 겸비한 모범적 교황이 존재했다. 레오 1세와 함께 ‘대교황’이라 일컬어진 그레고리오 1세(590∼604)는 자신을 수도사로 인식했고, 자신의 교황 선출을 단호하게 거절했다고도 전해진다. 스스로 ‘신의 종복들 중의 종복’이라는 호칭을 붙이며 겸손한 자세를 견지했고, 이전까지 교황들이 등한시했던 포교에도 열정을 보이며 후대 교회사 연구자들로부터 “교황 이념을 영적으로 확충시켰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로마 시에서 배출한 교황들이 연이어 게으르고 방탕한 생활을 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고, 10세기 교황의 위상은 하락하기 시작했다.

◇세계통치를 꿈꾸던 교황, 종교 분열의 시대를 맞다 = 교황과 교회의 위상이 땅에 떨어진 ‘암흑의 세기’를 지나, 로마 교회는 저돌적 성향의 그레고리오 7세(1073∼1085) 교황 시대를 맞이한다.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황제 하인리히 4세와 다투다 승리한 그는 아마 중세 교회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교황일 것이다. 당시 황제는 카노사 성에서 사흘 동안 교황에게 용서를 구했고, 이것이 그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이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7세는 그 의견과 행동이 비현실적이고 과도해 주민들은 물론, 추기경들로부터도 지지나 사랑은 얻지 못했다. 동시대 추종자마저 “성스러운 악마”라 언급했고, 후대 역사가들은 그를 ‘정치의 대가’로 분류하기도 한다. 또, “신에 복종하는 것은 교회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다시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라고 한 그의 광신적인 열정과 신념을 두고, ‘종교적 천재’였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종교와 정치의 차이를 이해하고, 현실적으로 행정 조직을 안정화한 교황은 우르바노 2세(1088∼1099)였으며, 법률적 지식에 정통해 다양한 법령을 제정한 건 인노첸시오 3세(1198∼1216)였다. 둘 다 십자군 원정의 시대를 살며, 세계사적 의의를 지닌 거창한 일들을 처리했다. 특히, 인노첸시오 3세는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과 흥미로운 연결고리가 있다. 바로 아시시의 성인 프란치스코가 이 시대 인물이다.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의 이름을 가져와 교황명으로 정했는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당시 급진적인 청빈 이념을 바탕으로 새로운 종교 운동을 이끌었다. 인노첸시오 3세는 교회 밖 다양한 종교 체험을 제도권 교회 내부로 끌어들였고, 이때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설립한 ‘작은 형제회’가 처음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1300년경은 교황사에서 교황권이 세계 지배의 정점에 이르는 과정이다. 그 선두에 보니파시오 8세(1294∼1303) 교황이 있다. 그는 재임기간 의사를 7번이나 교체하며 건강한 육체에 몰두했고, 자기 가문을 위한 부정 축재로 당대에도 비난을 받았다. 동시대를 살았던 단테는 ‘신곡’에서 보니파시오 8세를 지옥에 떨어트려 버린다. 현세적 재물에 대한 욕심이 죄명이다. 이후 교회의 부패와 사치, 세속화는 점차 가속화했고, 가톨릭 교회는 루터의 종교개혁과 함께 종교 분열의 시대를 맞게 된다.

◇과도기 교황의 숙명…새로운 힘을 충전하다 =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교황청은 내부 개혁을 통해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하려 노력했다. 이 시기 교황들은 가장 복잡하고 다층적인, 과도기적 시대를 살아내야 했다. 이에 대해 푸어만은 ‘교황의 역사’에서 “로마로부터의 이탈을 방지하고, 가톨릭 교회에 각성의 종소리를 울리며, 개신교의 종교개혁을 가톨릭적 개혁으로 맞서려는 시도가 다음 세대 교황들의 몫이 되었다”고 기술한다.

당시 교황들 중 가장 부각되는 인물은 ‘돌파의 달인’이란 수식어가 붙은 교황 식스토 5세(1585∼1590)다. 교회사 전문가였던 푸어만은 “가난과 낮은 출신 성분 등의 약점을 극복하고 교황 자리에 올랐던 인물들이 역사적으로 의미 있고,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분석했는데, 16세기 가톨릭 교회의 자부심이었던 식스토 5세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재임 첫날부터 산적과 거리의 좀도둑을 소탕했고, 재정을 개혁하고,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는 거대한 수로를 건설하고, 교회 건축에 열정을 쏟았다. 그러나 푸어만이 “교황의 모습을 한 파우스트 박사”라고 평가한 식스토 5세는 엄격한 사법 체계, 조세 부담 등으로 폭군에 가까운 세속 군주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의 사망 후, 교황청 서기장도 한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는 용납될 수도 없고, 바람직한 것도 아니었다”고 식스토 5세를 평했다.

◇바티칸 시대…현대의 교황들 = 17∼18세기 절대주의와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고, 19∼20세기에 이르러 교황의 역할은 국제화하기 시작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파격의 아이콘이었는데, 비오 9세 교황(1846∼1878)도 뛰어난 사교성과 자유로운 성향으로 초반 인기몰이하며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성실하게 일반 알현을 했고, 정치적 박해자들에 대한 사찰을 중단했고, 사면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통일은 교황에게 불리하게 작용했고, 로마와 교황령은 화약고로 변한다. 결국 이때 교황령이 소멸되고, 제1차 바티칸 공회의를 통해 가톨릭 교회는 로마로부터 이탈한 신자들을 포기하고 교황 중심의 교회로 방향을 튼다. 교회사적·교리적으로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교리 선포였다.

역대 가장 진보적이었다고 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탄생하는 데는, 이 시기 가톨릭 교회의 치열한 고민과 갈등이 바탕이 된 것으로 보인다. 비오 9세 이후 교황들은 ‘현대 세계의 조류를 거부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일인가’라는 질문에 봉착한다. 비오 10세부터 비오 12세(1939∼1958)까지, 세기 전환기를 두고 최근 역사가들은 ‘비오-교황들’의 시기라고 말한다. 푸어만에 따르면, 20세기 교황들은 19세기의 진보와 보수를 오락가락하던 시대를 끝내며, 변증법적 종합을 이룬다. 다시 말해, 전통적인 교황권의 명성은 장엄하고 성대한 예식으로 두드러지고, 높은 덕망을 소유한 교황의 영적 카리스마가 정착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비오 12세로 그는 당시 어떤 성직자, 정치가보다 이목을 집중시키는 매력적인 ‘스타’로서의 교황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가톨릭 교회의 개방성은 요한 23세 때 이뤄진 변화라고 볼 수 있다. 교황령이 소멸된 이래 교황들의 활동 반경은 제한적이었는데, 요한 23세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과 공개적으로 대화하기를 즐기며 ‘열린 태도’를 보였다. 그는 이에 대해 “누가 옳고 그른지를 밝히려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단지 함께 모여 분열을 종식시키려 합니다”라며 다른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여기에, 요한 바오로 2세의 1981년 저격 사건 이후, 교황은 평화와 용서의 상징이 된다. 1981년 5월 13일 총을 맞아 중상을 입었던 교황은 저격범을 용서하고, 형무소에서 그와 마주 앉아 오랜 대화를 나눈다.

역대 최장수 교황이자 프란치스코 교황과 ‘두 교황’ 시대를 풍미했던 베네딕토 16세는 신학자 출신으로 신앙과 믿음, 학문적 깊이와 성품 등으로 퇴위한 이후에도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 그의 이름 역시 평화를 상징한다. 베네딕토는 1차대전 시기 교회의 중립을 지키고 평화를 위해 노력한 베네딕토 15세, 그리고 유럽의 수호성인인 성 베네딕토에게서 따왔다. 얼마 전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이르러, 교황은 매력적인 인물이면서 탁월한 신학자, 평화의 상징, 인간적 면모를 겸비한 스타로서의 모든 걸 갖춘 초인적 인류로 부상한다. 최초의 남미 출신으로, 무슬림과 여성에게 세족식을 거행한 최초의 교황, 오순절 교회 박해를 사과하는 등 모든 것의 ‘최초’로 남게 됐다.

박동미 기자
박동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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