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우석의 푸드로지 - 누룽지
원래는 가마솥 바닥에 붙은 밥 의미
수분율 낮아 보존 쉽고 휴대도 편리
금방 지은 돌솥밥의 누룽지는 별미
전골 먹은다음 밥 볶아 긁어먹기도
중국은 궈바·스페인에선 소카라트
쌀 문화권 국가들의 요리도 이색적

최근 일본에 쌀이 모자란다고 한다. 지난해 여름부터 품귀 현상이 벌어진 일본의 쌀 대란은 갈수록 심각해져 요즘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 관광객이 무겁게 10㎏짜리 쌀을 사서 들고 가는 진풍경도 자아내고 있다. 일본 농림수산성은 2030년까지 쌀 생산량을 818만t까지 늘리겠다는 목표까지 설정했단다. 많은 생필품이 풍족해진 21세기에 듣기엔 낯선 뉴스다.
과거 우리도 그랬다. 요즘이야 찬란한 봄이지만 과거엔 흩날리는 꽃비조차 서러웠던 보릿고개였다. 쌀이 모자라 밥공기 크기도 제한하고 밀가루 먹는 날을 정하고 술빚기도 금지했다. 당시 솥바닥에 붙은 밥을 싹싹 긁어서 말려 두면 나중에 헛헛한 속을 때울 때 좋았다. 그게 바로 누룽지다.
그래도 누룽지는 다른 구황식품과는 격이 달랐다. 농축된 밥을 제대로 익혔으니 맛도 좋았고 영양가도 많았다. 게다가 그나마 쌀로 만든 것 아닌가? 누룽지를 찾는 이들은 단지 끼니가 모자라서만은 아니었다. 구수한 맛이 좋아 일부러 누룽지를 원했다. 고급 구황식품이나 아예 기호식품으로 인정을 받았다.
솥밥을 마지막으로 푸면 밥과 함께 누룽지를 그릇에 담게 되는데 이를 눌은밥이라 한다. 구수한 맛에 눈독을 들여 이를 따로 챙겨 먹는 경우도 많다. 쉬기 쉬운 밥보다, 누룽지는 수분율이 낮아 보존성이 좋다. 누룽지를 넣고 끓여 먹을 때 물을 얼마만큼 조절하느냐에 따라서 진밥이나 죽, 숭늉 등 마음대로 조리할 수 있으니 편의성도 좋다. 먼 길을 떠날 때 휴대하고 다니며 비상식량으로 썼다. 한마디로 ‘햇반’의 조상이었다. 일부러 밥을 구워 만들기도 하지만 원래 누룽지는 가마솥에 밥을 지을 때 솥이나 냄비 바닥에 눌어붙은 밥을 의미한다. 넓적하게 생겨나 ‘깐밥’, 타서 거뭇거뭇해진 탓에 ‘깜밥’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한국은 가마솥 문화라 밥을 짓기만 한다면 누룽지는 얼마든지 생겨났다. 누룽지를 쓰는 조리법도 여럿 생겨났다. 물을 충분히 잡아 그저 뭉근한 불로 끓여내면 숭늉이 됐다. 음료이자 후식(입가심)인 숭늉은 우리 한식에서 절대적인 기본 상차림이었다. 밥을 먹고 난 후 마무리는 당연히 숭늉으로 했다. 길 떠나는 이들은 봇짐 속에 누룽지를 챙겼고 전쟁 중에도 나눠줬다고 한다. 선원들이 비상식으로 먹는 건빵(hardtack)의 역할을 빼닮았다. 끓여도 그냥 먹을 수도 있는 것이 누룽지와 건빵의 공통점이다.
좀 딱딱하긴 해도 그냥 깨물어 먹는 누룽지는 과거 최상의 간식으로 꼽혔다. 설탕을 뿌리거나 굽고 튀겨서 먹기도 했으니 오늘날 건빵의 쓰임새와 아주 유사하다. 누룽지는 쌀 식문화권의 우리 입맛에 아주 잘 맞는 음식이다. 취향에 따라 그냥 밥보다 누룽지를 별미로 여기기도 한다. 살짝 탄내가 나는 특유의 향이나 식감이 자주 먹는 밥알과는 색다른 까닭이다.
그래서 시중 식당 중에는 누룽지가 생겨나도록 돌솥밥을 주는 집이 많다. 1인용 돌솥에 지은 밥을 내오면 먼저 밥을 덜어내고 나머지에 뜨거운 물을 부어 누룽지를 만들어 먹을 수 있다. 금방 지은 돌솥밥도 맛있지만 사실 누룽지를 먹기 위함의 목적이다. 고기나 전골을 먹은 후 밥을 볶을 때도 조금 눌어붙도록 하는 경우가 잦다. 살짝 눌은 볶음밥을 긁어먹으면 더욱 맛있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글지글 뜨거운 돌솥비빔밥으로부터 이미 터득한 학습효과다.
이 같은 장점 덕에 누룽지는 쌀밥보다 먼저 제품화가 됐다. 공장에서 밥을 구워 만드는 누룽지 제품과 물만 부으면 숭늉이 되는 누룽지 차는 예전부터 나왔다. 등산객을 위한 즉석 누룽지나 누룽지 과자 등이 출시되며 외국의 에너지바(energy bar) 역할을 하기도 했다. 가벼워 휴대하기 좋은데 만약 조난이라도 당한다면 누룽지를 꺼내 씹어먹으며 상당히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다. 군대에서 지급하는 전투식량에 든 밥은 ‘동결건조밥’이라 적혀 있는데 알고 보면 누룽지의 조리 원리와 같다.
다이어트에도 누룽지는 효과적이다. 탄수화물이긴 하지만 조금만 먹는 것으로도 포만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공복감을 이기기 위해 누룽지 과자를 먹는 다이어터(dieter)들이 있다. 맛을 주목해 나온 제품도 있다. 식당 카운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무료 누룽지 사탕이 그것. 밥을 먹은 후 숭늉을 마시는 ‘한민족의 식성’을 누룽지 캔디로 대체, 충족시킨다.
누룽지는 같은 쌀 문화권인 다른 나라에서도 곧잘 찾아볼 수 있다. 밥을 지을 때 누룽지가 생겨나는 것은 일상다반사이니 저마다 이를 두고 먹는 방법을 개발했다. 또 먹어보니 맛이 좋아, 일부러 밥을 굽거나 튀겨서 누룽지를 만드는 경우도 많다.
중국에는 궈바(鍋巴)라 부르는 누룽지를 다용도로 쓴다. 궈바는 솥에 떡을 구웠다는 뜻이다. 튀긴 누룽지에 해산물 육수를 부어 먹는 궈바탕(누룽지탕)에는 전해지는 유래가 있는데 바로 청 건륭제에 관한 이야기다. 민생시찰을 다니던 건륭제가 농가에서 얻어먹게 됐는데, 그 집에서 마침 남은 누룽지에다 국물을 부어낸 요리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대중요리로 발전한 누룽지탕은 찹쌀 누룽지를 만들어 튀긴 후 뜨거운 솥에 놓고 여기다 갖은 식재료를 넣은 육수를 한 번에 부어내는 것으로 발전했다. 일제강점기 충칭(重慶)에서 중국인들이 누룽지탕에 육수를 끼얹을 때 나는 요란한 소리를 두고 마치 도쿄(東京)를 폭격하는 것 같다 해서 의미를 두고 부르던 이름이 ‘동경폭작’이다.
밥을 지을 때 누룽지가 생기지 않게 짓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일본에선 누룽지를 쉽게 볼 수 없다. 다만 곳곳에 향토 요리란 이름으로 누룽지 죽(お焦げ)과 비슷한 것이 있다. 아키타(秋田)현에선 어묵을 만들 때처럼 꼬치에 쌀밥을 발라 구워낸 기리탄포(切蒲英)라는 원통형 누룽지 요리가 명물로 꼽힌다. 그냥 된장을 발라 구워 먹기도 하지만 보통은 나베(전골) 국물에 넣어 먹는다. 북방인 아키타에는 추운 날이 많아 모여서 함께 나베를 먹다가 기리탄포를 넣고 마무리한다.
큰 솥에 넣고 만드는 파에야에는 반드시 누룽지가 생긴다. 스페인에선 이를 소카라트(Socarrat)라 부르는데 볶음밥 누룽지이니만큼 가장 맛있는 부분으로 알려져 너도나도 노린다. 스위스 퐁듀에서도 마찬가지. 쌀은 아니지만 냄비에 치즈를 넣고 마지막에 눌은 치즈(La religieuse)가 드러나는데 이 역시 별미로 여겨 주인 말고는 건드릴 수 없다.

중동에선 은근히 누룽지를 즐겨 먹는다. 나라는 달라도 저마다 비슷한 것이 많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이란의 타딕(Tahdig)이다. 페르시아어로 냄비 바닥이란 뜻으로 정말 누룽지랑 똑같다. 다만 필라프, 타친 등 쌀 요리를 먹을 때 생겨나는 누룽지라 기름기나 육수가 배어 있는 경우가 많으며 커리와 함께 먹기 위해 그냥 만들기도 한다. 이때는 아예 라이스 케이크(rice cake)란 이름으로 동그란 모자 모양의 누룽지를 구워낸다. 바스마티 등 인디카 종을 쓰기 때문에 밥알 모양이 길쭉하다.
무엇이든 농축된 것은 현대인들의 취향과 맞아 떨어진다. 누룽지는 시간과 압력, 무게가 빚어낸 천연 농축의 미학(味學) 결과물이다. 곧 소풍의 시즌. 나들이나 캠핑 갈 때 누룽지 한 장 들고 나가 밥맛의 고갱이를 씹어 본다.
놀고먹기연구소장
■ 어디서 맛볼까

◇영계= 누룽지백숙을 판다. 일반적 누룽지를 깔고 끓이는 백숙이 아니다. 닭고기와 미음을 넣은 육수를 흥건한 상태에서 천천히 돌판 위에서 저어, 나중에 눌어붙은 얇은 누룽지를 긁어먹는 방식이다. 닭고기의 풍미와 양념을 머금은 구수한 누룽지가 바삭하니 아주 얇은 전병 과자같이 느껴진다. 커다란 토종닭도 물론 맛있다. 충북 괴산군 문광면 송문로옥성1길 112.

◇구워쓰닭= 미네랄찹쌀구이통닭이 시그니처 메뉴다. 미네랄 맥반석을 박아넣은 회전식 전기 오븐에 구워낸 닭은 껍질이 바삭한 베이징덕(북경오리)처럼 바삭해진다. 닭 구이를 뜨거운 철판 위에 담아내면 밑에 깔아둔 찹쌀밥은 곧 바삭한 누룽지가 된다. 야외 테라스가 있어 요즘 같은 때 생맥주를 마시기에도 딱 좋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 신도2길 114 1층.

◇락희안= 깔끔한 중국요리점. 만두 등 다른 요리도 소문났지만 전복 돌판 누룽지탕이 이 집의 상징 메뉴다. 전복을 중심으로 신선한 해물을 넣고 팔팔 끓여낸 육수를 누룽지탕으로 맛볼 수 있다. 육수를 붓고 나면 전분이 녹아난 부드러운 국물엔 갖은 해물의 풍미가 진하게 배어든다. 전복과 오징어, 주꾸미 등 신선한 해물은 육질이 야들야들하다. 서울 양천구 오목로 330 2, 3층.

◇페르시안 궁전= 인도와 이란 요리로 유명한 레스토랑. 양고기와 닭고기 커리를 비롯해 다양한 현지식 메뉴를 파는데 정통의 맛을 추구하는 이들이 멀리서도 알아서 찾아가는 집이다. 화덕에 구운 난과 함께 밥 종류도 많다. 이 중 이란 타딕과 비슷한 라이스 케이크가 있다. 인디카 품종 쌀에 기름을 두르고 구워내면 바삭한 ‘이란식 누룽지’가 된다. 서울 종로구 성균관로6길 9.

◇소학장수촌= 누룽지 백숙을 전문으로 하는 집. 현미와 오리, 알밤 누룽지, 스페셜 닭전복 누룽지 등 다양한 메뉴가 있다. 구성은 다르지만 한결같은 것은 역시 직접 만들어 더욱 부드러운 누룽지. 백숙과 함께 끓여낸 것을 닭고기만 먼저 접시에 담아주고 누룽지는 뚝배기에 담아 따로 내준다. 누룽지탕은 부드러우면서도 감칠맛을 품었다. 충남 공주시 소학길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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