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호 논설고문

“단 5초 만에 15기가와트(GW)의 전력 생산이 사라지면서 대정전이 시작됐다.”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는 지난달 29일 전체 전력의 60%가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했다. 초기에는 이상기후와 ‘유도 대기 진동’ 현상 등이 주범으로 지목됐지만, 점점 재생에너지 과잉 의존과 ‘에너지 고립 섬’으로 무게가 옮겨가고 있다. 스페인은 풍력이 23%, 태양광이 17%나 돼 날씨와 시간에 따라 전력 생산이 들쭉날쭉하다. 지난달 16일엔 풍력과 태양광만으로 전력 수요의 100%를 초과 생산했을 정도다. 교류는 직류와 달리 전력이 과도하거나 부족하면 주파수 급변동→발전기 손상→대정전으로 이어진다.

보완 대책은 크게 4가지다. 우선, 양수 발전이다. 잉여 전력으로 하부 댐의 물을 상부로 끌어올렸다가 전력이 부족할 때 수력 발전을 하는 것. 둘째,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하는 에너지저장장치(ESS)다. 셋째, 다른 국가들과 넘치거나 부족한 전기를 주고받는 전력망 공유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고립된 대표적인 ‘에너지 섬’이다. 넷째, 인프라 확충이다. 스페인은 최근 송배전 인프라 부족으로 자주 발전 출력을 제한해 왔다.

우리도 2011년 9월 15일 아찔한 순간을 겪었다. 무사히 여름을 넘기고 정비를 위해 원전 3기를 멈춘 사이 기록적인 늦더위로 냉방 수요가 급증해 대정전 위기를 맞았다. 대만은 2017년 8월 15일의 대정전으로 아예 국민투표를 통해 탈원전 정책을 폐기했다. 어느새 우리나라는 3∼5월이면 태양광 과잉 발전이 계절병으로 자리 잡았다. 중국도 태양광 과잉으로 역송전, 변압기 과부하, 기전(棄電·전력 폐기) 등 골치를 앓고 있다. 일본 역시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동북아 슈퍼그리드(전력망 공유)가 꿈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한·중·일은 에너지 섬으로 고립돼 있다.

암흑 세상은 가장 무서운 재난이다. 병원 환자들은 인공호흡이나 긴급 수술을 못 해 생명을 잃고, 2021년 2월 미국 텍사스주 대정전 때는 246명이 저체온증으로 숨졌다. 동북아 3국이 재생에너지 비중을 늘리려면 유럽처럼 슈퍼그리드부터 구축해야 한다는 에너지경제연구원의 지적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더구나 한국은 반도체 공장이 많고 스마트폰이 넘쳐나는 초(超)연결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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