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수 만화가, 방송작가
골목 바닥에 하얗게 널린 새똥
놀라서 다가가 보니 담배꽁초
누군가 항아리 갖다 놓았지만
바깥에 뒹구는 꽁초가 더 많아
아무 데나 던지지 말고 날 주오
애원 섞인 호소문조차 안 통해
사람들은 뭔가 모으기를 좋아한다. 우표에서부터 열쇠고리, 기념주화, 못 쓰는 휴대전화까지. 놀랍게도 골목을 수집하는 시인이 있었다. 골목은 사람이 다니는 통로이고 땅인데 그게 가능할까? 가능했다. 아름다운 골목 풍경을 가슴에 담는 마음의 수집이기 때문이다. 그거라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수집 맞다.
나도 골목을 좋아한다. 무미건조한 콘크리트 협곡 같아도, 골목은 도시의 실핏줄이자 소시민의 고향이다. 올봄은 왜 이리 늦나 싶어도 라일락·목련은 어김없이 꽃을 피우고, 새로 단장한 담벼락 벽화는 행인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아파트 주민들은 조간신문이 어떻게 오는지 모른다. 고양이 발소리보다 조용히 신문을 놓고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벽을 달리는 보급소 자전거 소리는 문명의 서막이다. 골목이 깨어나면서 도시가 숨을 쉬기 시작한다.
시인의 유지를 받들어 나도 골목 수집에 나섰다. 그런데 첫날부터 복병을 만났다. 골목 바닥에 새똥이 하얗게 널려 있다. 깜짝 놀라 가 보니 새똥이 아니고 담배꽁초 무덤이다. 참혹하게 망가진 골목 풍경. 기분이 상해 그 길을 포기했다. 그런데 다른 골목도 그랬다. 호젓한 공간이다 싶으면 담배꽁초 군락이다. 여기저기 벽에 나붙은 포고문과 함께.
‘절대 금연지구’ ‘고통받는 주민을 배려합시다’ ‘느이집에 가서 피우라’ ‘꽁초투척 과태료 10만 원’.
흡연이 건강에 어쩌고는 차치하고 너무도 보기 흉하고 민망했다. 폭우라도 쏟아져 저 많은 꽁초가 하수구로 쓸려 가면? 혹시 외국인들이 인터넷에 올려 우리나라 흉보면?
불길한 예감은 꼭 현실로 나타난다. 다음 날 아침, 어쭈쭈!? 금연 경고문 앞에서 담배를, 그것도 무려 다섯 명이 단체 흡연을 하고 있다. 신기하게 모두 외국인이었다. 바닥의 꽁초를 보고 흡연 장소로 오인한 것일까? 아닌 것 같았다. 피우던 담배를 밟아 끄고 새 담배에 불을 붙인 금발의 여인이 ‘금연’ 글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웃어대자 남자들도 다 따라 웃었다.
‘당신들 다 이리 와봐!’ 그 말이 목까지 치밀었지만, 조용히 골목을 뜰 수밖에 없었다.

이틀을 건너뛰고 새벽이 아닌 오후에 골목 벽화를 보러 집을 나섰는데. 어라? 담배꽁초 군락지에 누가 항아리를 하나 갖다 놓았다. 진작 그럴 것이지! 덕분에 골목이 깔끔해진 느낌이다. 기특한 항아리는 그러나 금방 나를 실망시켰다. 항아리 속에 꽁초 몇 개가 있었지만, 바깥에 뒹구는 꽁초가 훨씬 많다. 마침내 분통이 터졌다. 바보도 눈 감고 골인시킬 수 있는, 딱 벌린 아가리. 농구나 축구처럼 골문을 지키는 수비수도 없다. 아예 골키퍼도 없는 24시간 노마크 극장골 찬스 아닌가. 어째서 헛발질만 해 이리도 골목을 더럽힌단 말인가.
멀리 전봇대 뒤에 잠복해 지켜봤다. 따분하면 책을 읽어가며 장장 3시간 동안.
뜻밖에도 범인들은 차림새 멀쩡한 남녀노소들이었다. 그들은 항아리에 꽁초를 넣겠다는 의지가 처음부터 1도 없었다. 휴대전화만 들여다보고 걷다가 입에 문 담배를 대충 툭!
또는 구둣발로 쓱 밟고 갔다. 일부러 항아리에 안 넣는 더러운 자유를 즐겼다. 골목은 그렇게 유린당했고, 나는 맥이 탁 풀렸다. 청년 하나가 또 담배를 피우면서 걸어왔다. 하지만 놀라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다. 휴대전화에 꽂혀서 또 꽁초를 흘리고 가겠지. 그런데 어?! 청년은 담배를 살짝 발끝으로 밟아 끄더니, 버리지 않고 오던 길을 댓 발짝 되돌아갔다. 그러곤 항아리를 겨냥해 중거리 삼점슛을 날렸다. 꽁초는 항아리 옆구리를 때리고 바닥에 떨어졌다. 청년은 꽁초를 집어 들고 다시 뒤로 물러났다. 호흡을 가다듬고 재차 삼점슛. 하지만 또 노골이다. 나는 전봇대 뒤에서 비웃었다. ‘가지가지 하는군!’ 청년은 한 번 더 기를 썼지만, 꽁초는 또 빗나갔다. 청년은 꽁초를 집어 들고 다시 뒤로 물러나더니 이번에는 성큼성큼 항아리 쪽으로 걸어갔다. 야심 찬 덩크슛! 꽁초는 정확히 항아리 속으로 골인했다. 그제야 청년은 흡족한 얼굴로 가던 길을 갔다.
헛웃음이 나긴 했지만 며칠간 꽉 막혔던 가슴이 살짝 뚫렸다. 청년은 잠복 3시간 동안 골목을 유린하지 않은 오직 한 사람, 군계일학(群鷄一鶴) 모범시민이었다. 얼른 쫓아가서 커피라도 한잔하자 할 걸. 굼뜬 내 순발력이 인물 하나를 놓치고 말았다.
다음 날, 알게 모르게 정이 들어 버린 항아리를 보러 다시 골목에 갔다. 웬 할머니가 항아리에 큼직한 종이 한 장을 붙이고 있다. ‘과태료 10만 원’ 엄포문일까? 골목을 한 바퀴 더 돌고, 할머니가 파란 쪽문 안으로 모습을 감출 때 얼른 가서 읽어 보았다. 금연 경고문이 아니고, 미소를 짓게 하는 항아리의 호소문이었다.
‘담배꽁초 아무 데나 던지지 말고 나를 주오. 내 몸속으로 쏙 넣어주세요.’
읽고 다시 또 읽는 사이 날이 훤히 밝았다.
그러나 애원에 가까운 호소문은 별무신통. 애연가들은 비정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항아리 속이 아닌 골목 바닥에 무수한 꽁초들이 뒹굴고 있었다. 나는 놈들이 무섭다. 불에 타고 밟히고 부러진 것들이 무덤 속 황제의 병졸처럼 부활해 골목을 점령해 가고 있다. 무심한 애연가들이 놈들의 군비 확장에 매일매일 힘을 보태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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