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건국의 주역들 - ‘송진우 서거 80주기’ 특별대담
3·1운동 주도 ‘민족대표 48인’
1920·30년대 민족운동 이끌어
이순신 장군 등 민족정신 고양
처음으로 ‘한글날 제정’ 주창도
당시 일본과 미국의 충돌 예견
세계 정세·조선의 미래 꿰뚫어
광복 뒤 치안 유지·공산화 막아
美군정과 협력… 종속관계 아냐
고하, 신탁 지지했다는 건 오해
어떻게 반탁운동 전개할까 고민
다양한 세력 아우른 리더십 갖춰
서거뒤 해방정국 이념갈등 가속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박찬욱 서울대 명예교수
사회 : 현병철 고하자유민주硏 원장
정리=정충신 선임기자 csjung@munhwa.com
8일은 독립과 대한민국 건국에 공헌한 민족 지도자 고하 송진우 선생 탄신 135주년과 서거 80주기를 기리는 날이다. 고하는 해방 직후 혼란한 정국에서 자유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국가 건설과 국민 통합을 선도해 ‘자유민주주의의 원훈(元勳)’으로 불린다. 고하의 가르침을 오늘의 시대정신으로 재조명하기 위해 광복 80주년인 올해 3월 12일 고하자유민주연구원(이사장 송상현)이 설립됐다.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박찬욱 명예교수와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이 지난 2일 서울 중구 문화일보에서 고하자유민주연구원의 현병철 원장 사회로 고하의 삶과 사상을 주제로 좌담회를 가졌다.
△현병철(사회·이하 현) : 먼저 고하 송진우 선생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어떠한지요?
△김형석(김) : 역사학계에서 고하는 잊어진 독립운동가입니다. 고하는 1960년대까지 3·1운동을 국내에서 처음 모의하고 종교 간 연대를 통해 단일화된 만세운동으로 발발하도록 기획한 주인공으로 평가됩니다.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후에는 동아일보 사장으로 활동하며 국내 민족운동을 이끌었습니다. 해방 직후 이승만과 임시정부 요인들의 국내 안착을 돕고 자주 독립국가 건설에 종사한 독립과 건국의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잊어진 독립운동가가 됐습니다.
△박찬욱(박) : 정치학계에서도 고하의 사상과 행적을 깊이 연구한 전문가는 소수입니다. 1990년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 평전이 고하에 대한 지식과 이해의 확산에 기여했는데, 언론인이자 정치가인 고하를 ‘민족주의적 민주주의자’로 평가했습니다. 저는 고하가 민족주의와 함께 ‘인류 보편의 자유·평등·민주사상을 수용한 진보적 자유민주주의자’임을 강조합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고하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면서도 동시에 사회주의를 포용한 ‘중용적, 통합적 개혁주의자’라고 역설한 바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정치학계에서도 앞으로 고하에 대한 연구를 좀 더 진작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현 : 고하의 역사적 행적을 간략히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김 : 고하는 어려서부터 고향인 전남 담양에서 한학과 성리학 수학, 20대 일본 유학과 귀국 후 중앙학교에서 교육에 종사, 29세 때 3·1운동을 주도하고, 30∼40대에는 동아일보에서 언론인으로 활동, 55세 때 해방을 맞이해 건국을 위한 정치활동에 나섰다가 그해 연말에 불의한 청년들에게 피격을 당해 서거하셨습니다. 올해로 80주기가 됩니다.
△현 : 고하의 사상적 배경으로 성리학자 기삼연에게 수학한 것과 함께 일본 유학시절의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기’의 학업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박 : 고하는 소년기에 성리학을 수학하며 위정척사사상을 익혔는데. 이것은 후일 고하가 외친 민족불멸론과 일제필망론의 바탕이 됐습니다. 16세에 신학문을 접하고,18세 때인 1908년에 도일, 유학해 서구 근대사상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고하의 민족주의는 이성적 판단과 조선 민족의 도덕성에 기반을 둔 평화 추구의 민족주의로 발전했습니다. 고하는 1911년 와세다대학에서 메이지대학 법과로 전과해 1916년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기까지 시기에 인류 보편의 자유·평등·민주 가치를 적극 수용하는 사상적 대전환을 이뤘습니다. 당시 일본에는 다이쇼 시대가 시작되고 자유민권과 주권재민과 같은 서구 사상이 대거 유입됐기에 고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한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체제를 체득하고, 조선 땅에도 그러한 독립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절실한 염원과 강한 의지를 갖게 됐습니다. 고하는 사회주의 사상도 접했지만, 폭력혁명을 통한 계급해방을 외치는 급진 공산주의는 수용하지 않았습니다.고하는 유학시절에 강의실 학습을 넘어 독서, 유학생들과 친교, 일본 지식인과의 교류 활동을 왕성하게 펼쳤습니다. 고하는 유학생학우회의 중추적 인물로서 김병로 등과 ‘학지광’이라는 학회보를 창간했는데, 이 잡지의 3권 1호(1915년 5월)에는 고하의 ‘사상개혁론’이 실려 있습니다. 이 글에서 고하는 민주·자유·평등의 근대사상 관점에서 맹목적인 공자 숭상의 배척, 문벌주의 타파와 개인 자립, 실리교육, 산업 과학의 진흥, 법적·정치적 평등, 개인 자유와 양성 조화를 위한 자유연애를 주창하고 있습니다.
△현 : 고하는 1916년 귀국해 중앙학교 교장 때 3·1운동을 주도하지요.
△김 : 1918년 11월 11일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후 세계 질서를 논의하는 강화회의가 1919년 1월 파리에서 열린다는 소식이 국내에도 알려졌습니다. 이때 중앙학교 숙직실에 함께 기거하던 고하와 현상윤은 이 기회를 활용해 독립운동을 일으키기로 하고 천도교의 최린, 기독교의 이승훈을 연결시키고 나중에 불교의 한용운이 참여하면서 3대 종교 중심 민족대표 33인을 구성합니다. 그러나 고하와 현상윤은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서 서명에 참여하지 않고 거사가 실패할 경우에 대비해 독립운동을 지속시키고 수감 중인 사람의 가족을 돕는 등 뒷수습을 위해 2선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고하처럼 배후에서 3·1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15인을 합쳐 ‘민족대표 48인’이라고 부릅니다. 고하는 3월 중순쯤 체포돼 경성감옥에서 20개월 옥고를 치릅니다.
△현 : 고하는 출옥 후 동아일보 사장이 돼 민족운동을 선도합니다.
△김 : 고하는 동아일보 사장으로 1920-1930년대 국내 민족운동을 주도합니다. 첫째, 유적 보존 운동입니다. 1930년 충남 아산의 이순신 장군 묘가 경매로 훼손될 위기에 처한 소식을 듣고 모금운동을 일으켜 이를 보존하고, 아산 현충사와 한산도 제승당 등을 중건하였습니다. 둘째, 한글 보급운동입니다. 한글학회가 만든 통일맞춤법을 보급하려고 신문을 신활자로 인쇄하여 한글철자법을 확립하고, ‘한글날 제정’을 처음으로 주창하였습니다. 셋째, 브나로드운동 같은 농촌운동과 여자정구대회, 수영대회, 마라톤대회 등을 통해 민중 계몽운동을 선도한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일은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 독립역량을 배양하는 독립운동의 방편이었습니다. 덧붙일 말이 있는데 ‘완바오산(萬寶山)사건’과 고하의 역할입니다. 1931년 7월 만주 완바오산 일대에서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를 잃고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 농민들과 중국인 지주들 간의 충돌을 타 언론사의 오보로 인해 조선인과 중국인의 대결로 발전하자, 관동군은 이를 빌미로 만주사변을 일으킵니다. 이때 고하는 사태 추이를 정확히 파악하고 동아일보를 통해 조선인과 중국인 간의 갈등이 아니라 일본의 간계임을 보도하고, 국제연맹조사단(Lytton Commission)과 장제스(張介石)에게도 그 실상을 정확하게 전달합니다. 결과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虹口)공원 의거’와 더불어 조·중간의 우의를 돈독하게 한 대표적인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현 : 1936년 8월 손기정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으로 ‘일장기 말소사건’이 일어나서 고하는 퇴진합니다. 그 전말은 어떠합니까.
△김 : 1936년 8월 9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손기정이 우승하자 이 사실을 보도한 8월 1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손기정의 사진에 일장기가 삭제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사장 송진우, 편집국장 설의식 등이 사임하고, 사회부장 현진건을 비롯한 8명의 사원이 구속됐습니다. 그동안 이 사건은 이길용 기자의 단독 소행으로 알려졌는데, 최근의 연구 결과로 이길용이 쓴 ‘신문기자 수첩’이 발견됐습니다. 그곳에 당시 동아일보의 관행이었다는 내용이 기재돼 있어서 사장이던 고하의 역할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 박 : 이 사건은 고하와 동아일보 기자들이 엄청난 위협을 무릅쓰고 대단한 용기로 벌인 항일 거사입니다. 이 시기 독일에는 히틀러의 나치 독재가 심화하고, 일본에는 군국주의가 기승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일장기말소사건을 접하고 서울에 갓 부임한 미나미 지로 ( 南 次郞) 총독은 이에 강경하게 대처했습니다. 이 일과 관련된 편집국 간부와 기자들은 고초를 당하고, 동아일보는 무기정간 처분, 신동아와 신가정은 폐간됐습니다. 고하는 사장직에서 강제 사임을 당했습니다.
△현 : 고하는 동아일보 사장으로서 논설에도 간여, 많은 글을 남겼지요.
△김 : 1925년 8월 하와이에서 개최된 제1차 범태평양회의에 참석하고 귀국한 고하는 곧장 ‘세계 대세와 조선의 장래’라는 제목의 논설을 15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발표합니다. 고하는 이 글에서 장차 태평양시대의 도래를 예견하고, 미국과 소련의 충돌 도정에서 일본과 미국의 충돌이 일어날 것을 추리했습니다. 일본과 미국의 충돌이 발생하면 ‘거대한 자본’의 미국 세력하에서 조선이 해방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16년 전의 일입니다. 이처럼 고하는 우리와 주변 세계의 정세를 예의 주시하며 조선의 미래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정인보는 ‘고하의 통찰은 세계의 전도를 논한 것이 20년을 지나서도 맞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적확합니다’라고 평할 정도였습니다.
△박 : 고하가 남긴 많은 글이 있습니다. 그중에도 1925년 1월 4회에 걸쳐 실린 동아일보 사설이자, 1932년 4월 ‘삼천리’ 잡지에 게재된 ‘자유권과 생존권’이라는 논설이 대표적입니다. 이 논설에서 고하는 개인의 자기실현을 위한 자유권과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는 생존권, 즉 사회권적 기본권의 균형적 추구를 역설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병폐를 해소하기 위해 계급독재를 외치는 폭력혁명은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고하는 일제강점기에서부터 소작인 지위가 보장되는 농지개혁과 근로대중의 복지를 강조한 진보적 자유민주주의자였습니다. 한국민주당이 창당 때 자본주의를 보완하는 개혁적인 사회민주주의 경제정책을 수용한 것도 이 같은 사실을 말해줍니다. 좌파 이념만이 전향적 성격, 또는 진보성을 독점할 수 없습니다. 고하의 일관된 입장은 대중기반의 대의민주주의를 기틀로 해 구성원의 공존공영을 실현하는 국가를 건설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현 : 고하가 해방 직전에 조선총독부가 제안한 치안유지권을 거부한 일이 있습니다.
△김 : 1945년 8월 해방 직전에 전후 4차례에 걸쳐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권 인수를 교섭해왔으나 거절했다고 합니다. 특히 경기도 지사이던 이쿠다 세이자부로(生田淸三郞)가 고하를 초청해 지사실에서 면담하면서 ‘일본이 항복한 후에 조선의 치안과 통신·방송·신문 등을 맡아 평화적으로 일본 거류민이 일본으로 무사히 돌아가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했지만, 고하는 초지일관 ‘내가 나설 때가 아니다’라고 거절했다는 제헌의원 이상돈의 증언이 있습니다.
△박 : 고하는 패전 임박의 일제와 타협하면 일제의 괴뢰이자 민족 반역자가 되는 것으로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전쟁에 승리한 연합국의 인정을 받지 않는 통치권의 이양은 합법적이지도 않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고하는 ‘장물아비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현 : 고하는 해방 정국에서 국민대회준비위원회, 한국민주당 창당 등의 활동을 전개합니다.
△박 : 몽양 여운형은 1945년 8월 1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을 발족시켰습니다. 고하는 몽양의 권유가 있었으나 ‘건준’ 참여를 거부하면서, 1919년 이래 우리 민족 정치력의 본류인 임정을 배제하고 정부를 세울 수 없다는 ‘임정봉대((奉戴)론’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에게 휘둘려 ‘건준’의 주도권을 상실할 것이라고 예견했는데, 9월에 들어서자 건준의 내홍으로 민세 안재홍 등의 우파 인사들이 ‘건준’을 탈퇴했고, 6일 박헌영을 위시한 공산주의 세력의 주도로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이 선포되고 ‘건준’은 변질돼 버렸습니다. 정세를 관망하던 고하는 미군정이 선포된 7일 ‘건준’과 ‘인공’에 맞서 국민대회준비회(국준)를 출범시키며 전면에 나섰습니다. ‘국준’은 대중기반의 대의기구로서 자유민주주의 국가건설을 견인하기 위해 구상됐으며, 취지서에는 ‘임정 지지, 연합군 환영, 민정수습 강구’ 등이 천명됐습니다. 고하는 ‘국준’의 위원장을 맡았는데 급진 공산주의자를 제외한 온건 사회주의자를 포함해 다양한 세력을 규합했습니다.정당은 정부 운영을 주도할 세력의 결집체입니다. 해방 직후 창당한 조선민족당, 한국국민당 등이 통합해 1945년 9월 16일 한국민주당(한민당) 창당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창당 당시의 한민당은 우파 성향의 민족주의세력이 다수만, 온건 사회주의자도 상당수 포함됐습니다. 고하는 사실상의 당수인 수석총무로 추대됐습니다. 따라서 친일 문제에 흠결이 없던 고하가 이끈 한민당을 친일집단으로 매도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윤덕영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한민당 간부 중 일제에 협력한 인사 비율은 조선공산당 간부의 경우보다 오히려 적었습니다.
△현 : 한민당의 강령이나 정강정책을 오늘날에 평가하면 어떻습니까.
△박 : 고하의 건국 구상과 실천 전략은 한민당의 강령과 정책에도 반영됐습니다. 한민당의 강령은 조선 민족의 자주독립, 자유민주주의, 근로대중의 복리 증진, 민족문화의 고양, 인류 보편의 가치 존중, 국제평화 증진 등을 주창합니다. 또 정강정책을 보면 민생 안정, 교육 및 보건의 기회 균등,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일부 주요 산업의 국유화, 토지개혁 등을 포함합니다. 1945년 12월 22일 고하는 라디오 방송을 통한 정견 발표에서 한민당이 자유민주주의와 함께 ‘경제적 민주주의’를 지향한다고 밝힙니다. 이는 경제적 기회균등, 근로대중의 복지, 대자본과 독점기업의 국영 또는 공영, 경자유전의 토지제도 등을 가리킨 것입니다. 또 자본주의경제를 운영하되 사회정의와 공공복리를 위해서 정부가 일정 부분 시장에 개입, 관리할 필요성을 인정해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을 보완적으로 채택했습니다. 이처럼 한민당의 출범 시의 경제, 사회 정책의 기조는 개혁적 또는 진보적 성격이 농후했습니다. 공산주의자 박헌영의 말처럼 한국민주당이 지주의 이익을 위한 ‘부르주아 반동 세력’이라는 비판은 결코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것입니다.
△김 : 박 교수께서 자세하게 설명해주셨지만, 당시 한민당의 강령이나 정강 정책을 보면 요즘 시각에서도 선진적인 요소가 참 많습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천명하면서도 ‘경제적 민주주의’를 지향한다고 밝힌 것이나 근로 대중의 복리 증진에 기초한 노동정책 등은 주목할 만한 내용이지요. 고하가 활동하던 당시 한민당의 성격에 대해 재조명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현 : 이때 한민당은 미군정 하에서 사실상의 여당 역할을 감당합니다. 당시 한민당과 고하의 역할에 대하여 설명해 주십시오.
△박 : 38선 이남 지역에는 미군정이 선포되고, 승전 연합군인 미군이 진주하면서 현실적으로 통치권은 미군정이 장악하게 됐습니다. 한민당은 치안을 유지하고, 공산화를 막고, 자유민주 국가의 건설을 위한 절차를 배우기 위해 미군정을 도왔습니다. 고하는 미군정의 고문을 맡고, 조병옥을 경무부장으로 추천했습니다. 하지 군정사령관의 권고로 고하는 김병로, 김준연에게 헌법 기초를 위촉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미군정 초기에 고하와 한민당이 미군정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했으나, 미군정 시기를 통해 한민당이 사실상의 여당 임무를 수행했다는 것은 과도한 표현이며 왜곡의 소지가 없지 않습니다.
△김 : 박 교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반공주의자이던 고하의 정치적 노선은 9월 8일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이 자신만이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선포한 것을 계기로 미군정의 주요 파트너가 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고하가 미군정의 정책을 그대로 대변하는 종속적 존재가 된 것은 아니고, 자기 입장에서 미군정을 바라보고 자신의 판단 위에서 주동적으로 협력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현 : 가장 뜨거운 이슈가 신탁통치 문제였습니다. 이를 두고 고하가 신탁통치를 지지한다는 오해를 받게 됩니다.
△박 : 고하는 1945년 12월 2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최후까지 투쟁하자’는 담화를 통해 반탁입장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음 날 경교장에서 열린 대책 회의는 28일 밤을 지나 29일 새벽까지 지속됐습니다. 임정 요인들은 신탁통치의 내용에 대한 정보와 이성적인 검토 없이 미군정청과의 대립을 불사하겠다며 강경한 반탁을 주장했습니다. 이에 고하는 미군정과의 충돌은 피하면서 국민운동으로 반탁을 관철하자는 신중론을 개진하면서 임정 요인들과 격론을 벌였습니다.
△김 : 주목할 것은 반탁운동을 둘러싼 고하와 임정측의 마찰은 반탁과 찬탁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반탁운동을 전개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현 : 1945년 12월 고하가 불의의 피격을 당해 서거합니다. 당시 상황과 이 사건이 한국 정치에 끼친 영향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박 : 12월 30일 오전 6시경에 고하가 흉한의 저격으로 장서했습니다. 해방 직후 최초로 정치지도자가 암살된 사건이었습니다. 발족한 지 3개월밖에 안 된 한민당이 격랑에 휩싸였습니다. 고하 서거 후 1년 남짓한 기간 안에 김병로를 비롯한 진보적인 민족주의 세력과 온건 성향의 사회주의자 대부분이 탈당했습니다. 한민당에서 이탈한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은 민중동맹 등 중간 세력을 형성하였고, 한민당의 보수성은 한층 강화됐습니다. 이질적인 정치세력 간의 가교 역할을 했던 고하의 죽음 이후에 임정 세력과 한민당, 이승만과 한민당, 이승만과 김구 사이의 이격은 더 심해져 민족진영 내부의 분열이 가속화됐습니다.
△김 : 고하의 죽음이 사실은 장덕수·여운형·김구로 이어지는 일련의 암살사건의 시작이었기에 그렇지 않아도 혼란했던 해방 정국의 시계를 혼돈의 상태로 몰아갔습니다. 오늘날에도 만연한 이념적 갈등과 역사전쟁의 출발이기도 합니다.
△현 : 고하의 사상과 행적이 오늘날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어떠한 교훈을 주고 있는지요?
△박 : 첫째, 고하는 민족과 국가의 진로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지도자였습니다. 암울한 일제강점기에 민족불멸과 독립필지의 희망을 일깨워주었고, 세계사적 맥락에서 민족의 미래상을 구상하고 밝혀줬습니다. 둘째, 고하는 민족공동체의 이익 실현을 위해 살신성인한 헌신적 지도자로 애국애족했으며, 자유민주 독립국가 건설에 열정을 쏟으면서 투철한 책임감으로 실천했습니다. 셋째, 고하는 여러 사람과 다양한 세력들을 아우르는 포용과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줬으며. 이념 성향의 스펙트럼이 다양한 인물과 신뢰를 바탕으로 교유하고 동지로 함께 일했습니다. 한민당의 강령 정책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고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인 자유민주주의를 내용상으로 더욱 품격 있게 고양하기 위해 평등과 정의 구현에도 노력을 기울이는 포용적인 혁신을 추구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김 : 역사학계 일부에서는 고하로부터 비롯된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하를 연구해보면 박헌영 계열의 공산주의자를 제외한 좌파까지 포함하는 포용적 인물이었고, 농지 개혁·사형제 폐지·여권 신장 등 진보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대선에 출마한 후보들이 하나같이 국민통합을 이루겠다고 공약하고 있는데, 고하야말로 한국현대사에서 국민통합의 모델로 제시되어야 할 역사적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현 : 고하 송진우 선생의 사상과 활동의 요체를 말씀해주신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고하의 사상과 업적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가 고하를 선양하는 사업에 있어서 필수적입니다. 그런 뜻에서 고하송진우선생기념사업회는 올해 고하자유민주연구원을 발족했습니다. 연구원은 앞으로 한국 자유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고하의 생애, 사상과 행적에 관한 연구의 저변과 지평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정리=정충신 선임기자

진보적 자유민주주의 기틀 다져… ‘계급해방’ 공산주의는 배격
■ 고하 송진우의 삶과 사상
고하 송진우(1890∼1945) 선생은 3·1운동의 ‘막후 설계자’이자 진보적 자유민주주의 기틀을 다진 독립운동가 겸 언론인이다.
어려서부터 고향인 전남 담양에서 성리학을 수학하며 위정척사사상을 익혔는데, 이것이 후일 민족불멸론과 일제필망론의 바탕이 됐다. 16세에 신학문을 접하고, 18세 때인 1908년에 도일해 유학했다. 당시 서구 근대사상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고하의 민족주의는 이성적 판단과 조선 민족의 도덕성에 기반을 둔 평화 추구의 민족주의로 발전했다.
고하는 1911년 와세다대에서 메이지대 법과로 전과해 1916년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기까지의 시기에 인류 보편의 자유·평등·민주 가치를 적극 수용하는 사상적 대전환을 이뤘다. 당시 일본은 다이쇼 시대가 시작되고 자유민권과 주권재민과 같은 서구 사상이 대거 유입됐던 때였다. 고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한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체제를 체득하고, 조선 땅에도 그러한 독립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절실한 염원과 강한 의지를 갖게 됐다.
고하는 인촌 김성수와 돈독한 우의를 나눴다. 당시 언론에서는 동아일보를 기반으로 종횡무진 활약하는 송진우를 두고 ‘조선을 대표하는 정객(政客)’이라 부를 정도로, 동아일보 계열의 민족운동이 송진우를 중심으로 추진됐다. 3·1운동에서 송진우는 중앙학교 교장으로서 중심에서 기획하고 조정하는 컨트롤 타워 역할을 했다. 그의 곁에는 동고동락하던 현상윤과 평생 동지이자 든든한 후원자 김성수가 자리했다.
고하는 사회주의 사상도 접했지만, 폭력혁명을 통한 계급해방을 외치는 급진 공산주의는 수용하지 않았다. 고하는 유학 시절에 강의실 학습을 넘어 독서, 유학생들과의 친교, 일본 지식인과의 교류 활동을 왕성하게 펼쳤다. 고하는 유학생학우회의 중추적 인물로서 김병로 등과 ‘학지광’이라는 학회보를 창간했는데, 이 잡지의 3권 1호(1915년 5월)에는 고하의 ‘사상개혁론’이 실려 있다. 이 글에서 고하는 민주·자유·평등의 근대사상 관점에서 맹목적인 공자 숭상의 배척, 문벌주의 타파와 개인 자립, 실리 교육, 산업 과학의 진흥, 법적·정치적 평등, 개인 자유와 양성 조화를 위한 자유연애를 주창하고 있다.
1945년 광복 후 한국민주당을 조직해 활동하다가 암살당했으며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정충신 선임기자주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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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율 79.4%, 1997년 이후 최고치… 광주 83.9%로 1위·제주 74.6% 최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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