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도경 사회부 차장

일본 각지 헌혈센터엔 의사가 상주한다. 헌혈을 하려면 의사 면담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한국 의료체계와 비슷한 일본 지역사회에도 의사 부족 현상은 심각하다. 그럼에도 원칙은 지켜진다. 각 지역의사회가 당번제를 통해 헌혈센터에 의사를 근무시키고 있어서다. 일본 지역의사는 ‘지역 정원제’로 뽑힌다. 2022년 2∼3월 오미크론 유행 당시 일본 100만 명당 사망자 수는 1.86명으로 한국의 4분의 1에 불과했다. 일본 지역의료를 탐방한 한 지역병원장의 설명은 이랬다. “일본 지역의사들은 ‘우리 지역은 우리가 지킨다’란 사명감이 강했어요. 초기 방역에는 실패했지만, 지역 내 광범위한 확산에 맞선 방역엔 성공한 비결이죠. 일본 동부 주요 현에선 중증질환의 90%는 지역에서 치료를 끝낼 수 있어요. 일본 지역사회엔 의사들이 스며들어 있어요.”

한국 인구구조와 유사한 대만은 방문진료(왕진)를 독려한다. 당뇨, 고혈압, 치매 등 만성질환자와 병원을 오가기 힘든 고령 환자가 늘어서다. 대만 정부는 의사들에게 “환자를 찾아 나서라”고 권한다. 왕진을 가면 증세뿐만 아니라 환자 삶을 세심하게 들여다볼 수 있어 치료 효과가 좋아서다. 한의학 병행진료에도 적극적이다. ‘생활 습관병’인 만성질환자 편익을 높이기 위해서다. 대만은 2019년 한의사 방문진료를 건강보험 급여 항목에 포함했다.

10년 후 한국 인구 3명 중 1명은 노인이다. 의료체계는 미비한 상태다. 수직적 의료인력구조 탓이다. 근간엔 의료법이 있다. 현행법상 의료행위는 의사 판단과 지시에 따라야 한다. 해외에선 간호사, 물리치료사, 방사선사, 임상병리사 등이 할 수 있는 의료행위도 의사만 할 수 있다. 세계 각국이 인구구조 변화에 따라 보건의료직역 역할을 구체화한 법령을 만든 반면, 우리 의료법은 64년째 그대로다. 한국은 의사를 제외한 의료인 업무 범위가 가장 좁은 나라가 됐다. 의료계 부(富)도 꼭짓점에 있는 의사를 통해 재분배된다. 의료계에 ‘카스트 제도’가 존재한다는 비판은 거셌다.

국내 임상의사는 급성기치료와 미용의료에 쏠려 있다. 지역적으론 수도권에 편중됐다. 의료, 간호, 요양, 돌봄 등 지역 내 다양한 수요가 생기는 초고령사회엔 부적절한 구조다. 의사가 만성기 질환을 모두 치료할 순 없다. 모든 의료 현장에 의사가 다 필요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요즘엔 한의사와 간호사 등이 필요한 곳이 더 많아졌다. 의료인력 간 업무 범위 조정이 시급한 이유다.

실제로 하지도 않으면서 의사가 아니면 못 하게 만든 영역도 없애야 한다. 문신이 대표적이다. 의사들이 도외시한 지역사회 방문진료는 한의사 등에게 개방해야 한다. 한의사 방문진료를 원하는 장애인은 늘었지만, 대한의사협회 반발에 10년가량 가로막혀 있다.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권한만 독식해선 안될 일이다. 의협은 간호법에 ‘지역사회’ 문구를 넣는 것도 반대했다. 간호사 단독 개원으로 경제적 이익을 침해당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이익집단의 ‘지대 추구’ 행위는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 각 직역이 전문성을 발휘하도록 법적 지위를 정비해야 한다. 새 정부 과제가 될 의료 개혁을 위해서도 낡은 제도부터 청산돼야 한다.

권도경 사회부 차장
권도경 사회부 차장
권도경 기자
권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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