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호 논설고문

기획재정부는 작년 9월 “견조한 수출·제조업 중심 경기회복 흐름이 지속되고 있다”고 헛다리를 짚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고금리 기조로 내수 회복이 지연되고 있다”고 했다. 결국, KDI 진단이 맞았다. 한국의 경기 사이클은 미국·일본처럼 4∼5년 주기로 순환되는데 수출 의존도가 높아 외부 충격에 더 민감하다. KDI의 경기 진단은 어떤 경제정책이 필요한지, 각 경제주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려주는 풍향계다.
KDI가 지난 12일 드디어 ‘경기 부진’을 선언했다. 5개월 연속 ‘경기 둔화’를 경고해 오다 한층 더 암울한 단계로 끌어내린 것이다. KDI는 지난주 2040년대 잠재성장률이 0%로 주저앉는다는 섬뜩한 묵시록도 내놓았다. 국책 기관답지 않게 정치권 눈치 살피지 않고 용감하게 나서는 모습이다. 지난 30여 년간 보수·진보 정권에 따라 코드 맞추느라 독립성 논란이 증폭돼온 다른 국책 연구 기관들과 비교된다.
한국의 본격적인 성장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년) 때부터다. 박정희 대통령이 총지휘자였지만, 그 밑그림을 설계한 인물이 이르마 아델만(Irma Adelman·1930∼2017)이다. 미 메릴랜드대-UC버클리대 교수를 역임한 세계적 개발경제학자다. UC버클리대는 추모록에서 ‘아델만 교수의 큰 정책적 기여는 한국에서 한 작업’이라며 ‘수출주도 성장, 관세 인하, 이자율을 두 배로 올려 인플레이션을 막아야 한다는 제안 등이 한국 경제를 크게 성장시켰다’고 평가했다.
그는 1972년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정부가 감사를 표하려 하자 “차라리 통도사의 ‘팔정도(八正道)’ 탑과 똑같은 석물을 KDI 정원에 세워 달라”고 했다. 양산 통도사 개산조당 앞의 이 탑은 불교 수도자들이 실천해야 하는 여덟 가지 덕목을 새겨놓았다. 정견(正見·바르게 보기)·정사(正思·〃 생각하기)·정어(正語·〃 말하기)·정업(正業·〃 행동하기)·정명(正命·〃 생활하기)·정진(正進·〃 정진하기)·정념(正念·〃 깨어 있기)·정정(正定·〃 집중하기) 등이다. 경제학자들도 올바르게 생각하고 올곧게 말해야 한다는 경구다. KDI는 서울 홍릉에서 세종시로 옮길 때 팔정도 탑부터 먼저 옮겼다. 앞으로도 KDI가 할 말을 하는 싱크탱크로 남아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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