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규 한국원자력연구원장

지난 9일 미국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백악관의 대대적인 원자력 중흥 정책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아직 서명하진 않았지만 곧 발효될 것으로 보인다. 주요 내용은 2050년까지 미국의 원전 용량을 4배로 늘리고, 신규 원전 인허가가 18개월 안에 될 수 있도록 규제 체제를 정비하며, 국방부 주도의 신규 원자로 확대를 추진하고, 우라늄 농축을 포함한 원전 공급망을 재건하는 것이다. 이 안(案)은 ‘2017년 이래 세계 신규 원전의 87%가 중국과 러시아 설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경계하면서, ‘미국의 원자력 르네상스를 비상 시동하기 위해서는 신속하고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중흥책의 배경을 밝히고 있다.

현재 원전 용량이 97GW로 세계 최대인 미국이 2050년 400GW로 목표를 4배로 늘려 잡은 것은, 인공지능(AI)의 급속한 확대에 따른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급증이 주요인이다. 구글·마이크로소프트·아마존 등 미국의 주요 빅테크 기업들은 이미 원자력 전력을 확보하기 위한 적극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빅테크 기업들과 미국 정부가 원자력 전력 확대에 나서는 것은, 데이터센터에는 어마어마한 전력이 하루 24시간, 주 7일 (24/7) 안정적으로 공급돼야 하기에 재생에너지로는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의 에너지 안보와 세계 원전시장에서의 기술 패권을 강화하기 위해 원전 대폭 증설을 추진하는 것이다. 지난해 조 바이든 행정부는 민주·공화 양당 합의로 원자력촉진법(ADVANCE Act)을 제정했는데, 이번 백악관의 행정명령안은 원자력의 신속한 확대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조치이다.

미국은 1979년 스리마일섬 원전(TMI-1) 사고 이후로 원전 건설을 중단했다가 2009년에 보글 3, 4호기라는 2기의 신규 원전 건설을 시작해 지난해 마무리했다. 30여 년의 건설 공백으로 인한 미국 내 원전 공급망 와해로 보글원전 2기 건설비는 350억 달러(약 50조 원)로, 당초 예산보다 2배나 들었다. 신속하고 경제적인 원전 확대를 위해 미국이 원전 공급망을 재건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지난 45년간 3년에 2기꼴로 원전을 건설하며 구축한 탄탄한 원전 공급망을 갖추고 있다. 다만, 농축 우라늄은 주로 러시아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중국과 러시아에 의한 세계 원전시장의 패권 장악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한·미가 협력해 우라늄 농축을 포함한 원전 공급망을 공동으로 강화하는 것은 양국에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하다.

한편, 현재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유형의 소형모듈원자로(SMR)를 개발하고 있지만, 전통적 원전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현 원자력 규제 체제에서는 제때 인허가를 획득할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 이는 SMR 사업의 큰 장애가 된다. 이번 중흥책에서 AI 확대를 미국 안보의 중요 사안으로 보고 미 국방부의 독자적인 인허가 체계 아래 새 원자로 건설을 가속화하려는 시도는 이런 불확실성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이보다는 원전 인허가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도록 원자력 규제 체제를 효율화하는 게 합리적이다. 시대 변화를 반영한 백악관발(發) 원자력 중흥책이 이번 6·3 대선에서 에너지 정책 분야의 중요한 이슈로 논의되길 기대해 본다.

주한규 한국원자력연구원장
주한규 한국원자력연구원장

기사 추천

  • 추천해요 1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