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 (57) 철학적 구역질

 

英화가 베이컨 작품 속

구토하는 인물 행위

들뢰즈, ‘작은 곡예’라 표현

“구멍통해 자신을 게워내”

 

사르트르, ‘존재와 무’서

“존재는 구역질 같은

직접적 접근방식 통해

우리 앞에 드러난다“

 

원치도 않았는데

스스로에 떠맡겨진 인간

구토는 근거 부재서 유발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영국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평생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저 ‘자유’라는 말의 내용을 채우는 것은 술, 도박, 연애 그리고 미술사로부터 사슬이 풀려 나온 그의 개성 넘치는 그림들이다. 밤이 되면 그는 구두약으로 머리를 검게 칠하고 술집으로 갔다. 거기서 술잔을 들고 오래 놀다 보면, 베이컨 자신이 되었건, 그의 동성 애인들이 되었건, 때로는 결국 세면대를 붙잡고 토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게 청소하기 얼마나 어려운데! 변기로 갔어야지. 영화 ‘나인 야드’(2000)에서 주인공을 맡은 매슈 페리는 모범적으로 변기를 붙잡고 토한다.

그래서 세면대를 붙잡고 있는 인물들이 그려지게 된다. 예를 들어 1976년 작 ‘세면대를 붙잡고 있는 인물’이 있다. 구역질이라는 동작 하나로 이 인물은 전적으로 ‘신체적’이 된다. 우리는 일하다가 책상 앞에서 졸 수도 있고, 밥 먹다가 딴생각을 할 수도 있다. 운전하면서도, 전화, 음악 감상, 대화 등 다른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역질할 때는 오로지 구역질에 충실해야 할 뿐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구역질할 때 우리는 철저히 이 불상사를 주관하는 신체일 뿐이다. 구역질을 위해 온몸을 바치는 자일 뿐이다. 들뢰즈는 베이컨의 이런 구토하는 인물의 행위를 ‘작은 곡예’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인물의 작은 곡예(개수대에서 구토하기)…구멍을 통해 자기를 게워내려고 하는 전신.”(서창현 역) 토하는 자가 구멍을 통해 자신을 게워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베이컨은 자신의 유명한 삼면화 속에서도 구토하는 인물을 표현했다. 베이컨의 삼면화는 세 개의 그림으로 구성된 전통적인 성당 제단화를 현대적으로, 비(非)종교적으로 상속한 것이다. 1973년의 삼면화에서 변기에 앉아 있기도 하고 불길한 그림자를 흘리고 있기도 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면대 앞에서 토하고 있는 인물은 베이컨의 애인 조지 다이어일 것이다. 그는 그림이 그려지기 한 해 전에 베이컨과 파리의 한 호텔에 투숙하던 중 약물 남용으로 사망했다. 이 그림이 애인에 대한 베이컨의 추도사 같은 것이라면, 조지 다이어는 그림 속에서 세면대를 붙잡고 최후의 순간을 맞기 전에 약물을 토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들뢰즈는 베이컨에 관한 책 ‘감각의 논리’(1981)에서 세면대에서 토하고 있는 인간 형상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신체-형상은 타원형적인 세면대에 매달려 있고 그의 손은 수도꼭지를 붙들고 있다. 이 신체-형상은 수챗구멍을 통해 빠져나가기 위해 자신에 대해 강도 높은 부동의 노력을 한다.…언제나 신체는…자신의 기관을 통해 빠져나가려 한다.”(하태환 역) 여기서 ‘자신의 기관’이란 구토하는 입을 말한다. 많은 경우 인물화에서 신체는 정지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 속의 신체란 자신이 선물 받은 생명을 구가하듯 계속 운동한다. 베이컨의 그림에서 토하는 입은 바로 신체의 이 ‘운동’을 가능하게 해준다. 구역질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눈물이 쏟아져 나오고, 더 토해낼 게 없는데도 입으로는 괴음과 함께 온몸이 쏟아져 나오려고 한다. 구역질 때문에 죽을 것 같을 때 역설적으로 몸은 자신 안에 담겨 있는 생명을 그 괴로운 율동을 통해 현시하는 것이다. 토하는 인간을 그린 베이컨은 바로 이 운동하는 신체를 포착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적인 인물화에서 벗어나 운동이라는 신체의 본질에 다가가고 있다.

그러나 구역질이 단지 신체의 운동을 표현하는 데 그치는 것일까? 구역질은 ‘존재’의 비밀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 사르트르와 레비나스의 몇 가지 글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사르트르는 그의 유명한 책 ‘존재와 무’(1943)의 서론 2절에서, ‘존재’는 구역질 같은 직접적인 접근 방식을 통해 우리 앞에 드러난다고 말한다. 사르트르만큼 구역질에 관심을 가졌던 철학자도 없을 것이다. ‘존재와 무’ 이전에 그가 펴낸 소설이 ‘구토’(1938)이다. 이 소설은 자신이 느끼기 시작한 구역질의 비밀을 캐내려는 주인공의 일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어느 날의 일기는 이렇다. “바로 이것이, 이 눈부신 명백함이 ‘구토’란 말인가? 나는 얼마나 머리를 쥐어짰던가? 그것에 대해 얼마나 많이 썼던가! 이제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존재한다.―세계는 존재한다.―그리고 나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뿐이다. 그러나 나와는 아무 상관없다.”(김희영 역) 나와 상관없는, 그러니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존재’가 구토를 유발한다. 이런 존재에는 심지어 나 자신까지 포함되어 있다!

사르트르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소설의 주인공에게 표면적으로 구토의 대상은 유럽의 전통적인 부르주아 문화와 종교이다. “더러운 자식들!(salauds)” 이것이 사르트르가 부르주아에 대해 늘 던지는 욕이다. 그런데 왜 전통적인 문화와 종교에 대해 욕하는 것일까? 그것들이 우리 존재의 참된 모습에 접근하지 못한다는 것을 사르트르에게 들킨 까닭이다. 예를 들어, 문화는 그 안에 가장이나 선생의 권위 같은 자리를 마련해 두고, 이 자리를 잘 차지하고 존중하는 것을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라고 말한다. 종교는 하느님의 도구로 사는 것이 존재의 이유라고 말한다. 이에 대한 사르트르의 반응은 구역질이다. 단지 심리적인 차원에서 이런 문화와 종교가 역겹기 때문만이 아니다. 쟁점은 문화이론이 아니라 존재론이다. 이것들이 존재함의 참다운 근거가 되지 못하기에, 그리고 존재함의 이유가 전혀 없기에 구토가 쏟아지는 것이다. 존재함에는 근거나 이유가 없다는 것, 인간은 존재 속에 그저 던져져 있을 뿐이라는 데서, 근거 부재에서 유발되는 것이 구토이다. 요컨대 이유 없이, 내가 원치도 않았는데 나 자신에게 떠맡겨진 나의 존재함에 직접 접근하는 통로가 구토인 것이다. 왜 존재하는지 모르는 채 존재한다는 사실이 구역질을 통해 알려진다.

이유 없이 나에게 떠맡겨진, 그래서 내가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나의 존재는 왜 구역질과 연관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사르트르보다 조금 앞서 구역질에 대해 사유한 레비나스의 생각을 살펴볼 수 있다. 레비나스는 ‘탈출에 관해서’(1935)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속에서부터 메스꺼워한다. 우리 자신의 심연이 우리 자신 아래서 억눌려 있다. 우리는 ‘속이 너무 울렁거린다.’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 자신의 이 불쾌하기 짝이 없는 현전이, 구역질이 체험되는 순간과 이를 둘러싼 분위기 속에서 관찰될 경우, 이것은 도저히 측정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이처럼, 구역질은 그 충만함과 완전히 맹목적인 현전 속에서 존재의 벌거벗음만을 발견해낼 따름이다.”(김동규 역) 구역질은 통제할 수 없고 맹목적이다. 언제, 어느 자리에서 갑자기 시작될지 모른다. 구역질의 이런 난감함을 손으로 잡을 듯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문장을 레온 드 빈터의 소설 ‘호프만의 허기’(1990)에서 찾을 수 있다. “술이 식도를 너무 많이 자극하고, 화장실이 너무 멀게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오곤 했다. 그러면 그는 뱃속의 것을 부엌 바닥에 토해냈다.”(유혜자 역) 큰 사고를 친 것이다.

구역질은 우리 존재가 우리 자신을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리는 표식이다. 구역질은 나의 존재가 나라는 주체의 지배에서 언제든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통제되지 않는 과식, 소화불량, 구역질. 이런 악순환은 하나의 상징으로서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다. 우리의 주체성은 어떤 악덕의 씨앗을 품고 있듯이 우리 존재를 품 안에 안고 있으며, 그러므로 이 존재는 조심해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일상적인 말로 풀자면, 조심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사르트르는 주체가 떠맡은 존재가, 그야말로 존재의 근거를 가지지 않는다는 데서 구역질을 느낀다. 레비나스는 구역질을 통해, 주체에게 떠맡겨진 존재가 주체의 지배를 받지 않고 맹목적으로 날뛰는 괴물 같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뭔가 ‘긍정적인’ 구역질은 없을까? 첫째, 아이를 가진 자의 구역질, 즉 입덧은 주체가 통제할 수 없는 존재를 증언한다. 그러나 이 구역질이 증언하는 그 존재는 괴물이 아니라 ‘미래’이다. 둘째,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에는 ‘강의 신’이 선물로 주고 간 구토를 유발하는 경단이 나온다. 그것은 가오나시의 과식으로 표현되는 모든 욕심을 소멸하게 하고 그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근본 화두는 끝 모를 욕심에 종말을 선사하는 구토인 것이다.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용어설명 - 조지 다이어

프랜시스 베이컨의 동성 연인. 베이컨은 1963년 자신의 집을 털던 좀도둑 다이어에게 사랑에 빠졌다. 다이어는 이후 약 10년 동안 그의 뮤즈로 그와 함께했지만 결국 1971년 자살로 생애를 마감한다. 프랑스 파리에서 베이컨 회고전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베이컨은 다이어가 죽은 뒤에도 그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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