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아 최인아책방 대표, 前 제일기획 부사장
브랜딩은 가치 쌓아가는 작업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것이 핵심
한자리서 ‘롱런’하는 사람들은
봉우리 만나도 주저앉지 않아
인생은 아픈 가시밭길 걸어야
비로소 훌륭한 브랜드로 남아
영화를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극장에서 영화 보는 걸 좋아한다. 요즘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덕분에 집에서도 아무 때나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지만, 나는 여전히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지’를 고집한다. 음식을 먹거나 여행을 하거나 음악을 들을 때도 ‘제격’이라는 게 있듯이 내게 영화는 여전히 극장에서 보는 것이 제격이다. 하지만 세상은 변해서, 사람들은 이제 웬만한 블록버스터나 화제작이 아니면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지 않는다. 엊그제 영화 ‘콘클라베’를 한 번 더 보려고 (이미 한 달 전에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다) 극장을 찾았을 때, 관객이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이나 되었을까. 영화를 만들고 전하는 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얼마 전 이런 마음으로 본 영화가 또 한 편 있다. ‘승부’. 역시 넷플릭스에 올라오기 전 극장에서 봤다. 영화는 재미있었다. 전설적인 바둑기사 조훈현과 이창호. 사제지간이자 경쟁자였던 두 사람의 운명 같은 승부가 흥미롭게 펼쳐졌다. 게다가 주연 배우가 이병헌과 유아인 아닌가. 두 배우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두 시간을 꼬박 빠져든 재미난 영화였다.
이 영화가 내게 말을 걸어온 대목은 따로 있었다. 배우 유아인. 영화는 진작에 완성되었으나 한참 개봉되지 못했다. 주연 배우의 대형 스캔들이 터진 것이다. 바둑은 여러 사람이 하는 단체 경기가 아니라, 두 사람이 일 대 일로 싸워 승부를 가르는 두뇌 싸움이다. 유아인의 등장 장면을 들어내자고 편집에 손을 대면 구성이 다 흐트러질 테고, 그렇다고 스캔들을 무시하고 개봉을 강행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세월이 웬만큼 흐르고 어찌어찌 해서 겨우 영화가 세상에 나왔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유아인을 생각했다. 그가 재기할 수 있을까. 10년, 20년 후에도 그는 배우일 수 있을까. 오십, 육십이 된 그를 계속 스크린에서 볼 수 있을까…. 아울러, 오래도록 잘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요즘 젊은 세대는 브랜딩에 관심이 많다. 특히 퍼스널 브랜딩(Personal Branding)에 관심이 크다. 뛰어난 성과를 내는 걸로는 충분치 않고 그것을 알리고 인지도를 높이며 마침내는 자기 분야의 브랜드가 되기 위해 서둘러 사회관계망(SNS)으로 향하고 공을 들인다.
그런데 말이다. 브랜딩엔 좋아 보이게 하는 것에 앞서 먼저 생각해야 할 중요한 전제가 있다.

브랜딩이란 시간과 함께 가치를 쌓아 나가는 작업이다. 단시간에 돈을 벌어 빨리 일에서 해방되겠다는 사람은 브랜딩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기본적으로 브랜딩이란 장기전을 전제로 한다. 시간의 이빨에 쉬이 허물어지거나 부서지지 않는 가치를 만들고 쌓아가며 유지하는 일이 핵심이다. 잘나가는 배우이자 반짝이는 브랜드가 된 유아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위기를 맞았다. 한동안 그는 대단한 배우였다. 개성 있는 연기로 금세 주연을 꿰찼고, 김희애 같은 대선배와 상대역을 하면서도 주눅 들지 않고 제 역할을 해냈다. 그런데 힘이 들었던 걸까. 그는 시험에 들었고 유혹에 넘어갔으며, 이후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다.
두어 달 전 우리 책방에서 북토크를 했던 한 저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힘들었지만 무너지지 않은 것을 칭찬하고 싶다고.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중증 장애인 형을 책임지느라 20년도 넘는 세월을 응급실과 수술실, 중환자실 앞에서 보내야 했고 이젠 희귀암 판정을 받은 아버지까지 ‘책임지는’ 삶을 살았다. 그의 말은 이렇게 이어졌다. 무너지지 않았다는 건 비뚤어지거나 체념하지 않고, 심각한 정신적 문제없이 잘 살아 보려는 마음을 놓지 않고 살아왔다는 뜻이라고.
어떤 일을 오래도록 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 우선,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현역이며 계속 통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건 어떻게 가능했을까. 흐리거나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날에도 중단하거나 지치지 않고 계속했을 거다. 언제나 날이 맑고 따뜻하면 걱정할 게 없다. 그저 하면 된다. 실제로 오래 하다 보면, 하는 대로 쭉쭉 잘 풀리고 주위도 온통 내 편인 것 같은 때도 있다. 그럴 땐 고마워하면서, 또한 최대한 누리면서 그저 하기만 하면 된다.
문제는, 먹구름이 몰려오고 비바람이 휘몰아칠 때다. 다 포기하고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 옆길로 새고 싶은 마음, 쉬운 길로 가고 싶은 마음이 시시각각 찾아온다. 이런 때가 한 번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한고비 넘었나 싶으면 또다시 봉우리가 앞을 가로막는다. 물론 그만둬도 된다. 유혹에 넘어가도 된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 분야의 브랜드가 되고 싶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인생에 꽃길만 있는 게 아닌 것처럼 한 분야의 브랜드가 되는 길도 비슷하다. 시간의 희로애락을 다 넘어야 비로소 브랜드가 되는 거랄까. 사람들의 눈엔 빛나는 기쁨의 순간이 주로 보이지만,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함께하지 못하는 긴 시간 동안 그들은 많이 외롭고 힘들었을 거다. 하지만 롱런 하는 사람들, 브랜드가 된 사람들에겐 공통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운 길로 가지 않고, 앞을 가로막는 봉우리 앞에서도 주저앉지 않은 것. 단기적으론 패했더라도 다시 길을 찾아 제 갈 길을 간 것. 그들의 긴 시간 속엔 이런 무늬가 깊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꽤 긴 세월을 살아서인지 이제 나는 누군가의 영광을 보면 그가 견뎠을 뒤편의 시간에 더 시선이 간다. 그러면서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오래도록 잘한다는 것에 대해서. 이름을 얻고 길게 유지한다는 것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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