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호 논설고문

 

플라자합의 악몽으로 환율 발작

힘에 의한 환율 조정의 트라우마

오히려 강달러 원하는 美 금융계

 

주목해야 할 관세 전쟁 주역 교체

트럼프, 승리로 포장할 양보 원해

품목관세 대신 쿼터제 고민할 때

블룸버그 통신이 14일 오후 4시 51분,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미국 재무부 차관보와 한국 기획재정부 차관보가 지난 5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만나 환율을 논의했다’고 보도했다. 순식간에 원·달러 환율은 1420.2원에서 1396.5원까지 떨어졌다. 단 10분간 1.66%나 폭락했다. 이달 초 대만달러가 2거래일 사이에 9.2% 급락(대만달러 가치 상승)한 것과 판박이다. 그때도 미국이 대만에 환율 압박을 한다는 뉴스가 방아쇠를 당겼다. 그 밑에는 끔찍한 1985년 플라자합의 악몽이 깔려 있다.

그해 9월 22일 미국·일본·독일·영국·프랑스 등 G5 재무장관이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단 20분간 회동했다. 합의문은 ‘미 달러화 가치를 내릴 수 있도록 서로 노력하고, 대외 불균형 축소를 위해 재정·통화정책을 공조한다’는 두 줄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보안등급이 높은 통신은 G5 재무장관 사이의 핫라인이다. 백악관 전화보다 삼엄하다. 그다음 날부터 일본 대장성에는 매일 미 재무부가 요청하는 당일 환율 목표치가 전달됐다. 미·일이 공동으로 달러를 풀고 엔화를 사들이는 협조 개입이 반복됐다.

엔화 절상 폭은 두 달 동안 10∼20%에 그칠 것이란 관측이 대세였다. 하지만 달러당 240엔에서 1년 뒤인 1986년 9월에 153엔까지 절상됐다. 그 후에도 미 재무부의 반강제적인 협조 메시지는 끊이지 않았다. 1987년 말 120엔대까지 오르면서 일본의 거품이 붕괴됐다. 일본은 양적·질적 완화와 마이너스 금리 등 온갖 극약처방을 동원했지만 ‘잃어버린 30년’을 피할 수 없었다. 힘에 의한 인위적 환율 조정이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는지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다.

그렇다고 플라자합의2.0 공포에 과도하게 짓눌릴 필요는 없다. 미 관세 전쟁이 발신하는 환율 메시지부터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제조업을 살리고 무역적자를 줄인다는 측면에서 약(弱)달러를 요구하는 게 사실이다. 상대 국가의 외환시장 개입을 비난하며 관세 폭탄으로 위협한다. 하지만 금융 쪽에선 강(强)달러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당장은 미 국채와 주가, 달러 가치가 모두 떨어지는 ‘셀 아메리카’를 막기 위해서고, 길게는 달러 패권을 유지하려는 포석이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은 “우리는 ‘강한 달러’를 추구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미국의 재정적자와 무역적자의 해법은 간단하다.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리면 된다. 지름길은 금리를 확 높이고 정부 지출을 줄이는 것이다. 실제로 고금리와 플라자합의 덕분에 1991년 경상수지가 흑자를 기록했다. 2000년에는 정보기술(IT) 호황과 세입 증가, 재정 긴축의 3박자가 맞아떨어져 재정수지도 흑자로 돌아섰다. 이젠 그런 쓰디쓴 극약처방을 기대할 수 없다. 유권자들이 싫어한다. 그 결과 지난해 미국은 예산의 19%를 국채 이자 비용으로 썼고, 경상수지 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3.9%나 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쌍둥이 적자를 남 탓으로 돌리며 관세 전쟁에 돌입했다.

미국이 영국·중국과 협상을 타결하면서 관세 기류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상점 진열대가 비거나 물가를 자극할 고율의 관세 대신 ‘쿼터제’로 초점이 옮겨가는 조짐이다. 영국의 경우 25%였던 자동차 관세를 10%로 낮춰주는 대신, 연간 수출 물량을 10만 대로 제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공약이자 가장 강경했던 자동차·철강 등 품목관세에서 후퇴한 것이다. 그는 단지 승리로 포장할 만한 양보를 원할 뿐이다. 수입 물량 감축은 고율의 관세 대신 러스트 벨트의 백인 근로자들을 설득할 만한 선물이다.

트럼프 대통령 주변에서 관세 강경파인 피터 나바로 백악관 고문·스티브 미란 경제자문위원장 등 중상주의자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 환율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는 ‘미란 리포트’도 뒤로 밀려났다. 대신 월가 투자은행 출신의 억만장자인 베선트 재무장관과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이 전면에 나섰다. 이들이 달러 패권을 결코 포기할 리 없다. 우리도 일본과의 협상 추이를 지켜보며 ‘7월 패키지 딜’에 다양한 선택지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 국내 자동차·철강업체들도 고율의 품목 관세나 급속한 원화 절상보다는 쿼터제로 기우는 분위기다. 내줄 건 내주고 챙겨야 할 것은 확실히 챙겨 ‘줄라이 합의’에서 희망을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이철호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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