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종훈의 백년前 이번週


100년 전 경성역을 떠나 부산에서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부산과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 사이를 운항하는 연락선)을 타고 다시 일본 요코하마(橫濱)나 고베(神戶)에서 기선(汽船)에 옮겨 타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공부하러 간 신여성들이 있었다. 고국을 떠나 태평양을 건넌 그들의 꿈을 한번 찾아가 보자.
“이을라(李乙羅)는 지금 저 아메리카 합중국 『뽀스톤』 대학에서 음악을 연구하고 있다. 그는 목소리가 곱고 가늘어 은실을 뽑는 듯하며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많은 취미를 가졌고 이화학당에 있을 때에도 하루도 게을리 아니하고 음악을 연구함에 전력을 다하였다고 그의 친구 모씨(某氏)는 말하였다. 그는 금년 6월에 뽀스톤 대학을 졸업하고 산뜻한 바람이 창밖에 불어오는 금년 9월에 귀국할 예정인바, 속히 본국에 돌아와 조선 여자계에 많은 공헌이 있기를 바란다.”(1925년 5월 20일 조선일보)
다음 날 신준려(申俊勵)를 소개하는 기사가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이화학당 교사로 활동한 그는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선동한 죄로 체포돼 투옥되기도 했다.
“기미년 삼일운동 당시에 조금도 두려움 없이 동분서주하다가 마침내 철창에 갇힌 몸이 되어 애달픈 생활을 했다. 1917년에 이화학당 대학부를 졸업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며 크게 활동을 하다가, 1922년에 모든 것을 다 내던지고 지식을 더 구하러 아메리카합중국을 향해 갔다. 오하요주(洲)에 있는 오하요(Ohio) 대학에서 가정학을 연구하며 다만 열심히 학업에 힘쓸 따름이다. 그는 비록 수만 리 타국의 객이 되었다 할지언정 부디 당신의 앞길이 영원히 빛날지이다.”
김마리아의 근황에 대한 기사도 실렸다. 그는 1918년 일본에서 2·8독립선언에 참여했고, 독립선언문을 한국에 가져와 교육·종교계 지도자들에게 독립운동을 촉구하며 3·1운동을 일으키는 데 공헌했다.
“애국부인단 사건으로 대구 감옥에서 1년 반 동안이나 철창 생활을 하던 김마리아 양은 지금 미주(米洲) 중앙 캔세스(Kansas)에 위치한 팍 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중이다. 1920년 6월에 대구 감옥에서 병으로 보석되어 거의 1년 동안이나 세부란스병원과 한양병원에 입원 치료받았다. 그는 북한산성 어떤 절에 들어가 중국 여자로 변복(變服·다르게 옷을 차려입음)하고 감시 중에 몸을 피하여 인천에서 배를 타고 상해까지 간 것이다. (중략) 그는 팍 대학에 입학하기 전 1년 동안은 치카고(Chicago) 어떤 공장의 여직공으로 노동하여 약간의 금전을 모아 처음 학비를 지출하였으며, 지금은 그 학교에 반공생(半工生·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학생)으로 있다 한다. (중략) 그가 고국에 있는 어떤 자기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말하길, 내 손으로 벌어서 내가 공부하는 것을 나는 더 귀하게 생각하는 까닭이다. (하략)”
뿌리 없는 꽃이 어디 있으랴. 오늘의 꽃이 피기까지 뿌리가 되어 주신 귀한 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나 또한 언젠가 누군가의 뿌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요즘이다.
19세기발전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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