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혁재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 전기정보공학부 교수

 

AI 고도화할수록 고용 줄지만

생산성 높아져 富의 집중 심화

산유국 방식 분배구조 불가피

 

석유 수입해 油化 강국 된 한국

도메인 특화 모델에 좋은 교훈

민감 데이터 분야에선 더 유리

최근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 사이에서 감원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그 배경에는 인공지능(AI) 기술의 급속한 발전이 있다. 과거에는 사람의 손을 거쳐야 했던 소프트웨어 개발 작업 중 상당 부분을 이제는 AI가 대신할 수 있게 되면서 인력 감축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빅테크 기업뿐만 아니라 산업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다. 단순한 코딩 업무는 물론이고, 초급 변호사나 회계사의 역할까지도 AI가 일부 대체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주로 화이트칼라 직종에서 이러한 변화가 두드러지지만, 머지않은 장래에는 블루칼라 직종 역시 AI와 로봇 기술의 발전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크다.

AI의 기능이 고도화할수록 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와 같은 변화가 생산의 위축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적은 수의 사람이라도 AI의 도움을 받으면 기존보다 더 높은 생산성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전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생산량은 유지되거나 오히려 증가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생산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이 줄어들고, 많은 사람은 생산 과정에서 소외되는 양극화가 심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AI를 독점한 소수에게 부(富)가 집중돼 분배 구조가 극단적으로 변할 수 있다.

이러한 AI 시대가 되면 AI를 독점한 소수로부터 국가가 세금 형태로 일정 수준의 부를 회수한 다음 국민에게 재분배하는 방식으로 운영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AI 시대는 산유국에서 석유를 통한 부의 창출 및 분배와 유사한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다. 산유국은 지하자원을 국가가 소유하고 이를 통해 막대한 수익을 올린 뒤 국민에게 나눠준다. 반면 AI 시대는 기술 자원을 민간이 독점하고, 국가는 이로부터 세금을 걷어 분배하는 구조가 될 수 있다.

AI 시대에는 챗GPT와 같은 초거대 파운데이션 모델은 석유처럼 글로벌 부의 중심 자원이 되는 반면, 이런 모델을 보유하지 못한 국가는 AI 경제에서 소외될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AI 기술이 핵심 자원이 돼 가는 시대에, 우리도 파운데이션 모델의 개발이 필요하다. 하지만 글로벌 빅테크 기업과 경쟁해 초거대 모델을 개발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현재 보유한 기술 수준도 낮고, 향후 투자 여력 또한 글로벌 기업에 비해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AI 개발 자체를 포기한다면, AI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경쟁할 수 있는 영역을 전략적으로 선택하고 집중하는 일이다.

우리나라는 산유국은 아니지만, 원유를 수입해 정제하고 부가가치를 높여 수출하는 정유산업을 키워 왔다. 그와 마찬가지로 AI 시대에도, 직접 ‘원유’를 생산하는 것이 어렵다면 정제 기술에 해당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초거대 파운데이션 모델을 직접 개발하지는 못하더라도, 이를 활용해 특정 응용에 최적화된 ‘도메인 특화형 AI’ 모델을 개발하는 방향이다. 도메인 특화형 AI란, 다양한 분야에 방대한 지식을 학습한 파운데이션 모델과 달리, 의료·제조·금융·법률 등 특정 분야에서 발생하는 데이터를 중심으로 학습된 모델이다.

도메인 특화형 AI는 초거대 파운데이션 모델을 기반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AI 정유산업’과 비유할 수 있겠다. 원유가 정제돼 다양한 석유화학 제품이 만들어지듯이 파운데이션 모델은 일종의 원재료 역할을 하고, 이를 정제해 특정 산업에 활용할 수 있는 AI 모델이 바로 도메인 특화형 AI다. 이 모델들은 특정 분야에 최적화돼 있어 상대적으로 적은 컴퓨팅 자원으로도 정확성을 높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특히, 보안이 중요한 민감한 데이터를 다루는 분야에서는 오히려 파운데이션 모델보다 특화형 모델이 더 유리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AI 정유산업’에 해당하는 전략이다. 이러한 접근은 기술 축적과 산업 응용을 동시에 가능하게 하며, 장기적으로 독자적인 기술 생태계를 구축하는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추후 특화형 모델 개발 경험을 기반으로 초거대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 경쟁에도 뛰어들 수 있을 것이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정유산업을 성공시킨 전략을 활용해 AI 시대에 살아남는 길을 찾을 수 있다.

이혁재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 전기정보공학부 교수
이혁재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 전기정보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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