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hy - ‘강릉 급발진’ 의심 1심 패소
3년전 손자 사망 ‘티볼리 사고’
유족, 제조사 KG모빌리티 상대
9.2억원 손해배상 소송 기각돼
운전자 “엔진제어장치 오작동”
車결함 주장에도 안받아들여져
재판부 “페달 오조작 가능성”
최근 5년간 급발진 의심 111건
소비자가 車 결함 입증할 책임
개정안, 업계 거센 반발로 표류

강릉 = 이성현 기자

“이게 왜 안 돼, 도현아 도현아~.”
지난 2022년 12월 6일 오후 강원 강릉시의 한 도로에서 티볼리 에어 차량을 운전하던 60대 여성 A 씨가 절규하듯 손자의 이름을 외쳤다. 당시 A 씨가 몰던 차량은 앞차(모닝)를 들이받은 뒤 굉음을 내며 더 달리다 중앙분리화단을 넘어 지하통로로 추락했다. 급가속으로 질주하던 차량 안에서 A 씨는 차가 제동되지 않는다고 30초간 다급히 외치며 손자를 불렀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당시 12세이던 손자 이도현 군은 사고로 숨졌고 크게 다친 A 씨는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치사 혐의로 형사입건됐다.
지난해 10월 30일 도현 군 할머니 A 씨는 사건 발생 1년 10개월 만에 수사기관에서 ‘죄가 없다’는 판단을 받고 형사책임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이것은 가시밭길이나 다름없는 제조업체와의 소송전이 본격화됐다는 것을 알리는 서막에 불과했다.
A 씨 등 유족 측은 이번 사고는 전형적인 급발진에 의한 것이라며 차량 제조사인 KG모빌리티(KGM·옛 쌍용자동차)를 상대로 9억2000만 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유족 측은 소송 과정에서 국내 최초 사고 현장 도로에서의 재연 시험과 ‘자동긴급제동장치(AEB)’ 기능 재연시험으로 차량 결함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법원은 운전자의 ‘페달 오조작 가능성’이 있다며 제조사의 손을 들어줬다. 지난 13일 춘천지법 강릉지원 민사2부(부장 박상준)는 도현 군의 가족이 KGM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 강릉 사고 쟁점과 1심 법원 판단의 이유는?= 유족 측은 소송 과정에서 “차량 엔진전자제어장치(ECU) 소프트웨어의 결함으로 인해 알 수 없는 이유로 자동변속장치를 장착한 자동차의 구동력이 제동력을 초과해 발생한 급발진 사고”라고 주장했다. 또 급발진 상황에서 AEB가 작동하지 않아 사고를 예방하지 못했다며 차량 결함이 이번 사고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우선 ECU 결함 주장에 대해선 차량의 사고기록장치(EDR) 기록을 보면 사고 당시 자동차는 최종 충돌 6.5초 전부터 제동페달은 작동하지 않고 가속페달만 100% 상태로 작동했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이에 대해 유족은 사고 당시 제동페달을 밟았으나 ECU 결함으로 인해 가속페달을 밟은 것으로 인식됐다고 반박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원은 “설령 ECU 결함으로 잘못된 주행명령을 내린다고 해도 전혀 다른 데이터 경로를 이용하는 제동페달 기록에 오류를 발생시킬 수는 없어 보인다”고 판시했다.
급발진 상황에서 AEB가 작동하지 않아 사고를 예방하지 못했다는 유족 측 주장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추락 직전 들이받은) 모닝 차량은 AEB가 작동되는 대상에는 해당하지만 당시 엔진 회전수를 고려하면 AEB 시스템이 작동하는 ‘가속페달 변위량’ 이상이라고 할 수 있어 결함으로 보기 어렵다”고 봤다. 가속페달 변위량은 자동차의 가속 정도를 퍼센트(%)로 나타낸 값으로, 가속페달을 얼마나 밟았는지를 나타낸다.
◇ 법정 증언한 ECU 전문가 의견은 달라= 재판부는 사고 전반을 고려하면 이번 사고는 가속페달을 제동페달로 오인해 밟았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여 ECU 결함으로 인한 사고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결론 냈다. 하지만 이번 소송에서 증인으로 채택된 ECU 전문가 B(35) 씨는 법정에서 ECU 결함에 의한 급가속 가능성을 언급해 주목받았다. B 씨는 국내 자동차 회사에서 ECU 개발과 양산 차량의 후속 관리 등 ECU 전 생애주기(life cycle)에 걸쳐 업무를 수행한 엔지니어 출신이다. 국내 급발진 의심사고 최초로 법정에서 ECU 전반에 대해 증언했다.
그는 재판부가 판결의 주요 근거로 삼은 EDR에 대해 “사고 발생 시 자동차 데이터를 기록하는 장치인 EDR은 급발진 현상이 시작된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어서 급발진 사고와의 연계성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B 씨는 재판부에 제출한 진술서에서 ECU는 구조가 복잡해 차량 출력 결함이 발생할 가능성은 매우 다양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B 씨는 “ECU 개발과정에서도 다양한 문제가 발생해 소프트웨어 로직을 지속적으로 보완해 나가고 있고 개발 과정에서 발견되지 않은 소프트웨어 결함이 양산 후 드러나기도 한다”며 “실제로 이런 결함으로 제조사에서는 리콜을 실시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 중에는 운전자가 의도하지 않은 가속, 즉 급발진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며 “EDR 기록의 불충분성 등을 종합해 보면 현행 검증 방식만으로는 급발진 문제를 충분히 규명하기 어렵다고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 급발진 소비자가 입증하긴 어려워= 한국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최근 5년(2020~2024년)간 자동차리콜센터에 접수된 급발진 의심사고 신고 건수는 총 111건으로 집계됐다. 국내에서는 급발진 의심사고를 둘러싼 손해배상 소송에서 제조사가 배상 책임을 진 사례는 대법원 확정판결로는 아직 단 한 건도 없는 상황이다. 그만큼 자동차의 결함으로 인한 급발진 사고라는 점을 입증하기 어렵다는 방증인데 이는 ‘제조물 책임법’이 철저하게 제조사에 유리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 제조물 책임법은 ‘제조물이 정상적으로 사용되는 상태에서 손해가 발생한 사실’ 등을 증명하면 제조물에 결함이 있었고, 그 결함으로 인해 손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피해 소비자 입장에서는 자동차의 결함을 직접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자동차 설계도면 1장조차 영업비밀을 이유로 제공받을 수 없는 현실을 감안하면 피해자는 철저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소송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도현 군 유족 측은 토로했다.
도현 군 사망사고를 계기로 지난 21대 국회에서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 5건이 발의됐으나 ‘입법례가 없으며, 산업계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이유로 결국 임기 종료와 함께 폐기됐다. 22대 국회에서는 현재까지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 8건이 발의됐다. 이들 법안은 고도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제조된 제조물의 경우 일반 소비자가 결함을 입증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따라 결함 입증 책임을 소비자에서 제조사로 전환하거나 피해자의 입증 부담을 완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개정안은 제조업 위축을 우려하는 산업계의 거센 반대에 부닥쳐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우선 피해 소비자의 권리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자동차에 기록된 EDR 데이터와 블랙박스의 외부 영상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는 제조사와 소비자가 사고 원인 공동입증 및 손해배상 비율을 합의하도록 하는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자동차급발진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이번 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의 경우 EDR 기록과 블랙박스 외부 영상 장면이 일치하지 않는 지점이 다수 있다”며 “재판부는 운전자의 페달 오조작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을 했는데, 뒤집어 얘기하면 오조작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김 교수는 “가능성을 전제로 사고책임을 전적으로 소비자가 지도록 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며 “급발진 소송 관련 소비자가 소송 과정에서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성현 기자주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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