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살고 싶은 계절을 고르라면/ 여름과 겨울 중 어떤 게 좋을까/ 돌아오지 않을 휴양지로 산과 바다는?/ 삶의 굴레에서 인간의 다음 차례로/ 개 혹은 고양이로 태어나야 한다면// 갈림길의 저편에서 미심쩍은 행색의 행려자가/ 한 손에는 언뜻 공평해 보이는 저울을/ 한 손에는 겁 주기용 칼을 들고 다가와/ 반드시 어느 한쪽을 고르시오/ 공갈을 놓는다면’

- 조온윤 ‘균형 감각’(시집 ‘자꾸만 꿈만 꾸자’)

식사를 하러 가는 길에 복권판매점이 눈에 띄었다. 막 걸린 것이 분명한 간판에선 광이 난다. 투명할 정도로 깨끗이 닦인 창문 너머 칠한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흰 벽이 눈부시기까지 하다. 운명이 베푼 백지인 것만 같다. 돌아오는 길에 잊지 않고 들러 복권을 샀다.

시간은 그 흐름 속에 나를 내맡기는 방법으로만 체감이 가능하다. 안타깝게도 시간을 제어할 방법은 없다. 그리하여 벌써 오월이고 곧 여름이고 친구의 머리칼은 희끗하며 그의 곁 어린 자녀는 키가 훌쩍 자랐다. 시간의 꾸준함과 한결같음에 우리는 감탄하고 탄식한다. 불가역성만큼이나 우리를 옥죄는 건 시간의 예측 불가능성이다. 곰곰 따져보면 ‘응당 그러함’ 같은 일은 많지 않다. 늘 의외이고 뜻밖이고 놀랍고 더러 괴롭다. 돌이킬 수 없는 의외의 세계에서, 그로 인해 우리는 수많은 가정을 하는지도 모른다. 좋은 쪽으로, ‘만약 그러하다면’과 같은 상상을 이어가는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 어쩌면 앞으로도 오지 않을 시간 속에서 나는 꽤 행복하다. 한편 이런 상상은 위험하지. 당장이 못마땅하게 느껴지니까. 실망하고 마니까.

복권 두 장을 두고 갈팡질팡하다가, 나쁠 게 뭔가. 누굴 해치는 것도 아니고. 만약 복권에 당첨된다면, 어려운 친구들도 좀 도와주고, 가지고 싶었던 카메라도 한 대 사고, 남은 대출금도 갚고, 아니 아니 먼저 어머니에게 돈을 좀 부치고, 동생들 살림도 보태주고, 아니 아니.

시인·서점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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