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lobal Focus - 빌게이츠 재산 환원으로 돌아본 ‘상속주의’

 

선진국 상속자산 8318조원

전 세계 GDP의 10% 규모

부동산·주식 크게 오른 영향

 

자본시장 ‘능력주의’ 퇴색되고

사회계층 간 이동 불가능해져

자수성가 부자 되기 힘든 구조

마이크로소프트(MS) 공동창업자인 빌 게이츠가 최근 자신의 재산 99%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혀 화제가 됐다.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부호인 그는 재산 환원을 통해 또 다른 자수성가 탄생을 돕고 이를 통한 새로운 발전을 추구한 것이다.

하지만 자수성가 부호의 사회 기부는 흔치 않은 일이고 앞으로는 더욱 찾기 어려워지는 추세다. 전 세계적으로 능력과 열정이 아닌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재산으로 부를 이루는 상속 부자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어서다. 영국의 역사학자 엘리자 필비는 이런 경향에 착안해 지난해 ‘상속주의’(Inheritocracy)라는 책을 통해 우리 사회가 다시 가문과 상속 재산에 기반한 19세기 사회로 회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자수성가 줄고 상속 부자 늘어= 과거에는 노력과 재능이 부를 결정지었다면 지금은 상속 재산이 삶의 질과 성공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2025년 기준 선진국에서 상속되는 자산은 약 6조 달러(약 8318조 원)로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10%에 해당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이 수치가 5%에 불과했던 20세기 중반의 2배 수준이다. 이러한 경향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뿐 아니라 미국 등 선진국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다. 프랑스 파리경제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프랑스에서는 전체 자산에서 상속에 의한 자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1970년대 30%대에서 2020년 기준 60%에 육박했고 미국에서도 1989년부터 2019년 사이 상속 자산 규모는 세 배 이상 증가했다. UBS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상속을 통한 억만장자 수는 53명으로, 자수성가형(84명)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특히 상속을 통한 부의 형성이 초부자들만의 영역이 아닌 중산층과 노동층에서도 어렵지 않게 목격됐다.

어느 때보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된 시기에 상속주의가 부활한 배경은 크게 두 가지가 거론된다. 우선 개인들의 부가 급증한 것이다.

20세기의 경우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개인 자산이 줄고 인플레이션으로 현금과 국채 가치가 급락했다. 각국 정부들도 무거운 자산세와 국유화 정책을 선호하면서 많은 부유 가문들의 재산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이후 큰 전쟁이 없고 주택의 가치가 비약적으로 상승하면서 부동산에 근간을 둔 가문 재산들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펀드 등 새로운 투자 상품 출시에 따른 주식시장 호황도 이들의 가문 재산이 늘어나는 요인이 됐다. 반면 생산성이 떨어지며 선진국의 GDP 성장률은 눈에 띄게 하락하면서 상대적으로 전체 GDP에서 상속자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게 된 것이다.

두 번째는 인구구조의 변화가 꼽힌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는 주식과 주택 시장이 급증한 시기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른 세대보다 더 큰 부를 쌓을 기회가 많았다. 이들이 이렇게 쌓은 부를 상속하면서 상속 재산 규모 자체가 커진 것이다. 부동산 시장 붐은 우리가 알고 있는 1%의 부자 외에 노동자들에게도 상속할 수 있는 막대한 부를 안겼다. 특히 베이비붐 세대의 상속은 사후가 아닌 사전 상속으로 확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전문가들은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로 향후 30년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부의 이전을 보게 될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자본주의 약화 우려= 상속이 삶의 질과 성공을 좌우하는 핵심 조건으로 떠오르면서 현대사회의 근간인 자본주의가 약화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자본주의의 정당성을 지탱해온 ‘능력주의’와 ‘기회의 평등’ 가치가 상속주의 확대로 명분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일에 대한 열정과 헌신이 줄면서 사회 역동성과 혁신 노력도 뒤처질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사회 환경이 경제성장 저해를 불러온다고 지적한다. 이와 관련, 이코노미스트는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결혼을 잘하는 것이 부자가 되는 최고의 방법으로 여겨지는 19세기 경향이 되살아나고 있다고 짚었다. 프랑스 코트다쥐르대 사회정치 철학 교수인 멜라니 플루비에즈는 현 상황에 대해 “노동보다 상속이 더 중요한 사회가 됐다”며 “노력, 공로, 학위 등을 통해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지만 이들이 (상속받은 이들을 제치고) 최고 부의 지위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해졌다”고 말했다. 특히 상속으로 쌓은 부를 바탕으로 교육, 취업, 주거 등 삶의 모든 영역이 고착화되면서 계층 간 이동이 어려워지고 빈부 격차는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회를 두고 영국 임피리얼 칼리지대 경영대학원 경제학 교수인 제임스 세프턴은 “좋은 부모, 가난한 시민”의 사회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영국의 한 조사에서 상류층 40%는 다른 사회계층과 정기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영국 싱크탱크 레솔루션 파운데이션은 최신 보고서에서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상속 기대치를 가진 사람들과 짝을 이루는 경향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사정이 이렇지만 상속세가 없는 국가들이 적지 않고 상속세 자체도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가운데 상속세가 없는 나라는 호주와 캐나다, 노르웨이, 멕시코, 뉴질랜드 등 15개국이다. 이탈리아는 4%, 스위스와 폴란드는 7%로 10%에 미치지 못한다. 국제통화기금(IMF)과 OECD 등은 40% 내외의 상속세를 권장하고 있다. 다만 상속세의 효과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해 기업 승계나 이중과세 피해를 야기하지 않는 선에서 면제 규정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탁, 사전증여, 해외 자산 등을 통해 상속세 회피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황혜진 기자
황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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