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철환의 음악동네 - 박지현 ‘깜빡이를 켜고 오세요’

면허 갱신하러 경찰서 가는 도중에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빗방울 사이로 기억 하나가 돋아난다. 처음으로 차를 몰고 과감하게 광화문 네거리까지 나갔다가 아슬아슬한(그보다 아찔한) 추돌사고를 냈다. 속수무책으로 당한 앞차 기사가 설명하기 힘든 표정으로 내리더니 한 마디 던진다. “뭐 하자는 겁니까.” 나는 조용히 떨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완전 초보라서.”

교통경찰은 성가신 듯 묵언으로 나의 죄목을 가리킨다. ‘네 죄를 네가 알렷다’ 그런 의도였으리라. 나는 생활지도 교사에게 불려간 중학생처럼 또박또박 읽었다. ‘전방주시 태만, 안전거리 미확보’ 차량의 흐름을 주의 깊게 안 살피고 과도하게 밀착했다는 얘기다. 내 입으로 시인한 이 13글자는 그날 이후 인생 내비게이션의 일부로 장착됐다. 과거가 마음을 어지럽힐 때 지나간 일에 너무 연연하지 말자. 그 어떤 인간관계에서도 적당한 거리 확보는 필수다. 인생 학교에선 벌칙금이 장학금 역할도 한다. 고난에도 유익함은 있다.

올 5월엔 비가 잦았다. 이름 속에 비를 품은 이호우(李鎬雨·1912∼1970)님의 시조가 생각난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여기는 사철 향기 가득한 노래마을. 동네 한 바퀴 훑으면 소설 몇 권 나오는 건 시간문제다.

유심히 들어보면 노래마다 풍경과 각성이 혼재돼 있다. 이문세가 부른 ‘광화문 연가’의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바로 앞에는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이라는 자각이 나온다. 서태지는 ‘소격동’에서 ‘어느 날 갑자기 그 많던 냇물이 말라갔죠’ 그래 놓고는 이런 자의식 한 조각을 덜커덩 남긴다. ‘내 어린 마음도 그 시냇물처럼 그렇게 말랐겠죠’ 동물원이 부른 ‘혜화동’에는 ‘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찾아가는 그 길’이 흑백사진처럼 펼쳐지는데 (‘응답하라 1988’에는 쌍문동으로 나온다) 이어지는 가사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

설운도의 ‘나침반’ 속에는 거리 이름이 즐비하다. ‘종로로 갈까요 명동으로 갈까요 차라리 청량리로 떠날까요’ 이걸로 끝이 아니다. 계속 우왕좌왕(동분서주?)한다. ‘미아리로 갈까요 영등포로 갈까요’ 그래서 너는 도대체 지금 어디 있다는 거냐. 답을 하기는 한다. ‘을지로 길모퉁이에 나는 서 있네’ 우리는 길을 잃은 게 아니라 사람을 잃었다. 그래서 부르짖는다. ‘내가 찾는 그 사람은 어디 있나요’(설운도 ‘나침반’)

데뷔한 지 3년 만에 대규모 단독콘서트를 연 가수 얘기로 넘어간다. 한 사람이 전국을 돌며 객석을 채우려면 팬들의 대오가 공고해야 한다. 그래야만 큰 무대를 확보할 수 있다. 오디션(‘미스터트롯 2’)에서 2등을 한 박지현(1995년생)은 지금이 화양연화다. 콘서트 제목부터 눈길을 끈다. 쇼도 아니고 쇼맨도 아니고 ‘쇼맨십’이다. 사전을 뒤지니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뜻이 동시에 뜬다. 1. 특이한 언행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그들을 즐겁게 하는 기질이나 재능 2. 얄팍하게 남을 현혹하여 그때그때의 효과만을 노리는 수완.

공연장에선 쇼맨십, 경기장에선 스포츠맨십이 중요하다. 오디션에선 두 개가 다 필요하다. 박지현의 데뷔곡(‘깜빡이를 켜고 오세요’) 메시지는 인생길에도 적용된다. ‘클락션을 눌러주세요’라는 경고도 나오는데 (바른 표기는 클랙슨, 제조사 이름) 만약 앞차가 지그재그(비몽사몽) 할 땐 경적이 선택 아닌 필수다. 사고는 순간이다. 어쩌면 사랑도 교통사고와 비슷할 수 있다. ‘내 인생에 훅 들어온 당신’(‘깜빡이를 켜고 오세요’)에 아찔하게 당하기도 한다. 그러니 어느 줄에 서더라도(그를 따라갈 때도, 내가 앞장설 때도) 정신 줄만은 놓지 않는 게 안전하다.

작가·프로듀서· 노래채집가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4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