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고 - 김성중 한양대 원자력공학과 교수

우리나라는 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i-SMR)의 조기 상용화를 위한 다양한 노력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i-SMR이 지닌 고유의 설계 특성과 우수한 피동안전성을 바탕으로 비상계획구역(Emergency Planning Zone, EPZ)의 합리화를 추진하는 시도는 사업화 가능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핵심 전략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 진보가 산업 현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합리적이고 선제적인 규제 체계의 정립이 필수적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 업체 뉴스케일파워는 대표적인 선도 사례다. 뉴스케일파워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설계인증신청(DCA), 부지조기허가(ESP), 통합운영허가(COL) 등 사전 인허가 절차를 적극 활용하며 핵심기술과 안전기준을 규제기관과 공유하고 위험 요소를 체계적으로 분석·보완해 왔다. 특히 소형 다중모듈 기반의 설계를 근거로 EPZ를 발전소 부지 경계 수준까지 축소하는 데 성공했고, 이는 NRC로부터 공식 인증을 받은 세계 최초 사례로 기록됐다.
우리 또한 i-SMR의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EPZ 축소와 표준설계인증 등을 추진 중이나, 현재 국내 규제체계는 여전히 대형 경수로 중심의 과도한 보수적 인허가 구조에 머물러 있다. SMR에 특화된 위험도 기반 안전기준, 중대사고 범주 설정, 확률론적 안전성 분석(PSA)의 확대 적용 등은 아직 제도화되지 못한 상태다. 이처럼 기술 개발 속도에 규제 제도 정비가 미치지 못할 경우, 글로벌 시장 진입의 ‘골든타임’을 놓칠 위험이 크다.
지금이 바로 국회의 초당적 지원 아래 규제기관이 중심이 돼 선제적인 제도 정비에 나서야 할 시점이다. 첫째, SMR의 특성에 맞는 위험도 정보 및 성능 기반(RIPB) 규제 체계를 조속히 구축해야 한다. 이를 위해 뉴스케일파워의 사례처럼 불필요한 보수성을 제거하고 피동안전시스템의 실질적 효과를 반영하는 새로운 중대사고 평가 기준을 도입해야 한다. 또한 격차보고서 및 주제보고서와 같은 개발자 제출 문서를 기반으로 한 사전검토 절차의 제도화를 통해 효율적이고 투명한 인허가 절차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둘째, EPZ 축소와 관련해 정량적 방사선원항 평가 기준을 조속히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이미 국내 규제지침에 언급됐고 NRC의 공식 기준으로 자리잡은 대체방사선원항(NUREG-1465)을 적용함으로써 모든 원전에 동일하게 부과되고 있는 비현실적 규제 보수성을 현실화할 수 있다. 아울러 미 연방의 원전 관련 규정(10 CFR 50.160) 및 NRC의 성능기반 비상대비 규제지침(RG 1.242)처럼 SMR에 특화된 EPZ 평가 체계를 국내에 도입하는 것도 무엇보다 시급하다.
마지막으로 i-SMR의 성공적 안착을 위해 정부와 국회의 정책적 컨센서스 형성이 중요하다. SMR은 세계적으로 탄소 중립과 에너지 안보를 동시에 충족할 수 있는 전략적 기술로 주목받고 있으며, 이를 국가의 미래 에너지 포트폴리오와 산업 수출 전략의 핵심 축으로 인식해야 한다.
한국이 세계 SMR 시장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기술 개발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규제 환경의 선제적 혁신과 실효성 있는 제도 기반 마련이 병행돼야만 사업화가 가능하다. 뉴스케일파워의 경험은 이를 잘 보여준다. “기술은 혼자 성공할 수 없다. 제도와 함께 가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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