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일기자의 여행

서산에서 대만·日까지… ‘코스타세레나호’ 크루즈 여행

 

코로나때 ‘곧 없어질 것’ 비관론

위기 극복하고 최대 호황기 맞아

인공섬 매입 전용리조트 조성도

 

선박 크기 따라 여행의 질 좌우

길이 289.6m·폭 35.5m ‘웅장’

객실 1500개·최대 4000명 탑승

 

부부 등 ‘관계’와 함께하는 여행

공연·강습·체험 프로그램 가득

‘한국인끼리 가는 크루즈’ 추천

일본 나가사키항의 마쓰가에 국제여객선터미널에 정박 중인 코스타세레나호. 터미널 건물과 비교해보면 유람선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오른쪽 능선의 초지에 개항 후 이곳에 머물던 영국인 상인들이 거주하던 역사적 건축물을 옮겨 야외박물관처럼 꾸민 나가사키의 대표적인 관광지 ‘구라바엔’(글로버 가든)이 있다.
일본 나가사키항의 마쓰가에 국제여객선터미널에 정박 중인 코스타세레나호. 터미널 건물과 비교해보면 유람선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오른쪽 능선의 초지에 개항 후 이곳에 머물던 영국인 상인들이 거주하던 역사적 건축물을 옮겨 야외박물관처럼 꾸민 나가사키의 대표적인 관광지 ‘구라바엔’(글로버 가든)이 있다.

지룽·나가사키 = 글·사진 박경일기자

최근 몇 년 사이에 크루즈 여행의 대중화 속도가 빨라졌다. 크루즈 여행은 이제 ‘실버 여행’의 프리미엄 여행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크루즈 여행 대중화의 일등공신은 롯데관광개발이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일찌감치 크루즈 여행에 손을 댄 것도, 해외 유명 크루즈 회사의 선박을 처음으로 전세 내 운항한 것도, 여러 번의 경험으로 한국인 여행자에게 맞는 크루즈 여행을 만들어낸 것도, 다 이 회사가 한 일이다.

크루즈 여행시장이 자연스럽게 커진 것 같지만,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등의 공중보건위기와 미국발 금융위기 등 적잖은 위기상황이 있었다. 한 번 운항에 수천 명의 손님을 태워야 하는 크루즈는 경제·사회적 영향을 많이 탄다. 경기불황으로 소비가 줄거나, 공중보건 문제가 터지거나, 지정학적 위협이 대두하면 즉각적인 영향이 미친다. 가장 치명적이었던 건 ‘코로나19’였다. ‘떠다니는 배양접시’란 멸칭 속에서 크루즈 여행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위기를 넘어 존립 자체를 의심받았던 시간이었다.

크루즈 여행이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는 유람선을 타고 여행하는 소비자들이 항해와 여행의 특별한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리 좋아서 ‘프리미엄 여행의 종착지’라 불릴까. 크루즈 여행은 왜 즐거운가, 크루즈 여행은 어떻게 즐겨야 하는가. 충남 서산의 대산항을 출항해 대만 지룽(基隆)과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부산항으로 돌아오는 이탈리아 국적의 유람선 코스타세레나호를 타고, 승객 2400여 명과 함께 일주일 동안 여행하며 그 답을 찾아봤다.

# 크루즈가 노인요양시설이 된다고?

코로나19가 창궐하던 당시로 가보자. 그 시절에 ‘크루즈 여행은 곧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내다본 전문가들이 적잖았다. 코로나19의 공포를 경험한 소비자들이 앞으로 수천 명이 한 배를 타고 생활하는 크루즈 여행은 절대로 선호하지 않을 것이란 주장이었다. 그렇다면 대양을 누비던 호화유람선은 다 어떻게 된다는 말일까. 그때 나왔던 일부 전문가들의 극단적인 전망은 충격적이었다. “이제 대형 크루즈 선박은 떠다니는 저소득 노년층의 요양시설쯤으로 전락하게 될 겁니다.”

대양을 건너가며 호사스러운 여행서비스를 제공하던 유람선이 연안을 떠다니는 싸구려 노인 수용시설이 될 수 있을 것이란 주장이었다.

결과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로다.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예측이었다. 다시 시작된 크루즈 여행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크루즈 여행은 팬데믹 기간 동안 중단된 여행을 갈망하는 수많은 이들의 ‘버킷리스트’가 됐다가, 코로나19 이후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인기 크루즈 코스는 예약이 쉽지 않다. 심지어 1년 전에도 예약이 힘든 경우가 있다. 유럽의 지중해 크루즈도, 카리브해의 크루즈도 마찬가지다. 크루즈 회사 로열캐리비안은 지난 4월까지 올해 예약분의 86%를 팔아치웠다. 지난 26일 미국 ‘메모리얼 데이’ 연휴에는 선사별로 크루즈 여행 고객이 전년보다 20%까지 늘었다. 급기야 올 한 해에만 자그마치 1900만 명의 미국인이 크루즈를 탈 것이라는 예상까지 나왔다.

# 섬을, 유람선의 갑판으로 사용하다

이런 기록적 호황에 힘입어 크루즈 회사들이 앞다퉈 혁신을 시도하고 있다. 세계 최대 크루즈 회사 카니발은, 인공섬에 정박지를 갖춘 이른바 ‘리조트 구역’을 조성하고 있다. 크루즈만 들고나는 이른바 ‘프라이빗 섬’을 만드는 것이다. 인공섬에 테마파크 같은 공간을 만들어 워터 슬라이드와 스쿠버다이빙을 즐길 수 있는 시설은 물론이고, 배에서 내려 도보나 수영으로 갈 수 있는 30개 이상의 레스토랑과 바를 집어넣는다.

크루즈 회사 로열캐리비안은 인공섬을 사들여 최고급 리조트를 건설하고 있다. 오는 12월에도 바하마의 인공섬에 리조트를 개장한다. 이 회사 소유의 세 번째 섬이다. 또 다른 크루즈 회사인 MSC크루즈도 준설로 만들어진 바하마의 섬에다 개인 요트클럽과 농장을 지었다.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고, 더 많은 수요를 만들어내기 위한 시도다.

더 크고, 더 고급스러운 유람선이 등장하고, 더 길고 더 비싸게 여행하는 고급 럭셔리 크루즈 상품도 속속 나오고 있다. 모든 객실을 야외테라스가 있는 스위트홈으로 설계한 크루즈가 등장하고, 고급리조트의 부티크 호텔을 방불케 할 정도로 호사스러운 유람선도 나왔다. 여기까지는 크루즈 여행의 세계적인 트렌드 이야기. 그렇다면 우리의 크루즈 여행은 어디까지 왔을까. 일반적인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건 목적지다. ‘어디로 가느냐’만큼 중요한 건 없다. 하지만 크루즈 여행은 다르다.

크루즈 여행의 품질은 전적으로 ‘배’가 좌우한다. 크루즈 여행에서 유람선은, 이동 수단이 아니라 목적지에 가깝다. 크루즈 여행이 목적이고, 기항지는 여행을 위한 양념쯤 된다. 그러니 무엇보다 크루즈 여행의 목적지인 배가 중요하다. 과연 어떤 배를 타야 할까.

# 크루즈 여행에서 배가 중요한 이유

크루즈 여행상품은 여러 종류가 있다. 지중해나 카리브해, 알래스카 등을 운항하는 해외 크루즈 상품을 대신 예약해주는 상품 얘기는 여기서 논외로 하자. 지금부터는 보통 봄·가을 즈음에 한꺼번에 수천 명을 모아 진행하는, 국내에서 출항하는 내국인 전용 크루즈 상품 얘기다. 이런 크루즈 여행에서 타는 유람선은 우리 것이 아니다. 국내 크루즈 여행의 유람선은 모두 해외에서 다 빌려온 것이다.

‘코스타크루즈’라는 회사가 있다. 1854년 창업한 이탈리아 크루즈 회사로, 세계 최대 크루즈 기업 ‘카니발’의 자회사다. 이탈리아 국기를 달고 운항하는 9척의 유람선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 여행사가 크루즈 여행상품을 만들면서 단골로 전세 내서 가져오는 배가 코스타 회사의 ‘코스타세레나’라는 배다. 이 배는 2007년 건조된 이탈리아 크루즈 선사 코스타 소유의 크루즈 선(船)이다. 유람선 크기가 크루즈 여행의 고급스러움과 비례하지 않지만, 어쨌건 크루즈 여행 로망의 전제는 ‘입이 딱 벌어질 만큼 큰 배’에 있다. 크루즈 선박이 저마다 배의 크기를 뽐내는 이유다.

코스타세레나호의 길이는 289.6m. 폭은 35.5m다. 숫자로는 감이 안 온다. 여행사가 비교하는 건 서울 여의도 63빌딩이다. 63빌딩 높이가 249.6m니까, 배가 63빌딩 높이보다 40m 더 길다. 배에는 1500여 개 객실이 있다. 최대 탑승 승객은 2930명. 여기다가 크루즈 운행에 필요한 선원 1000명쯤이 더 타니까, 배 한 척에 타는 최대 탑승 인원은 4000명에 육박한다.

코스타세레나호는 13층이다. 층마다 별자리 이름을 붙였다. 배 안에는 3층짜리 대극장과 5개의 레스토랑, 그리고 10개의 바 또는 라운지가 있다. 수영장 혹은 자쿠지의 풀 숫자만 8개다. 카지노도, 면세점도, 사진관도 있다.

크루즈 선박을 전세 내는 걸 두고서 ‘배를 빌린다’고 표현하지만, 배만 가져오는 건 아니다. 배를 운항·관리하는 선원들은 물론이고, 승객을 위한 음식을 만들거나 서빙하는 직원, 매일 객실을 청소하는 메이드까지 통째로 다 빌려오는 것이다. 배를 선택한다는 건, 그 배 규모의 시설, 그리고 배를 운용하는 시스템이나 서비스까지 모두 다 빌려온다는 뜻이다. 크루즈 여행에서 배를 선택하는 게 중요한 이유다.

# 이탈리아 유람선과 잔치국수

지중해풍의 디자인으로 내부를 장식한 코스타세레나호가 지향하는 건 ‘축제 분위기’다. 직원은 대부분 동남아시아나 라틴아메리카, 카리브해, 동유럽 출신. 하지만 선장이나 기관장, 엔터테인먼트 연출자, 메인 셰프 등 관리 책임자는 다 이탈리아 사람들이다. 배에서 이탈리아의 DNA가 제법 진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유람선 프로그램 특유의 유쾌한 느낌이 그렇고, 극장에서 올리는 다양한 쇼의 분위기도 그렇다.

무엇보다 음식에서 이탈리아 향이 짙게 느껴진다. 배 안에는 피자 전문 레스토랑과 이탈리아 젤라토만 파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따로 있다. 레스토랑이나 바에는 이탈리아 와인의 리스트가 유독 길다. 잠자는 시간 빼고, 거의 무한정 제공되는 뷔페 메뉴에는 파스타류를 비롯한 이탈리아 요리가 자주 보인다. 분위기도, 입맛도, 크게 거부감이 없다. 이탈리아 사람들과 기질이 비슷해서일까, 코스타세레나는 한국인 여행자에게 잘 맞는다.

게다가 10여 년째 한국 손님을 태우면서, 코스타세레나호가 한국인 손님에 맞게 진화한 부분도 있다. 식사 메뉴에 김치는 기본. 뷔페레스토랑은 물론이고 4코스의 정찬 메뉴에도 김치와 고추장을 빠뜨리지 않는다. 정찬 메뉴에 코스와는 별도로, 비빔밥을 사이드 메뉴리스트에 넣어 언제든 주문해 먹을 수 있도록 했다. 한국인 손님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건 야식 메뉴로 제공하는 잔치국수와 비빔국수. 모두 다 외국인 셰프들이 배워서 만든 것인데, 멸치액젓을 넣어내는 잔치국수 맛이 훌륭했다. 선사에서 한식을 제공하는 건, 연령대 높은 한국인 고객에 대한 배려다.

# 크루즈 여행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

한국인에게 ‘맞춤 유람선’ 같았던 코스타세레나호가 아시아를 떠난다. 2007년 프랑스 마르세유 항구에서 손님을 태우고 첫 항해를 시작한 코스타세레나호는, 주로 지중해 항로를 운항하다 2015년 아시아로 옮겨와 한국과 일본, 중국, 대만, 말레이시아, 태국과 필리핀 등 아시아의 주요 항구와 휴양지 등을 다녔다.

코스타세레나호는 내년 말쯤 일본 도쿄를 출발해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세계 일주 항해를 한 뒤, 아시아를 떠나 남미와 지중해로 근거지를 옮긴다. 코스타세레나호의 남미·유럽 항로 투입은, 기존에 이 지역을 운항하던 ‘코스타포르투나’호의 매각에 따른 것이다.

코스타포르투나의 매각 소식을 담은 현지 보도의 제목에 ‘충격’이란 단어가 들어있다. 유럽 사람들에게 포르투나는 한때 지중해의 낭만을 상징하는 아이콘과 같은 이름이었던 모양이다. 문장마다 스러져가는 추억의 애잔함이 새겨져 있었다. 이 기사의 마지막 문장이 이랬다. “전설적이고 잊을 수 없으며, 감정적으로 충만한 지중해 여행의 한 장을 마무리한다.”

아직 크루즈 여행 경험이 적은 우리 입장에야, 코스타세레나호가 아시아를 떠난다고 해서 애석한 마음이 들 리 없다. 그저 코스타세레나호가 남미와 지중해로 배가 돌아가기 전에, 한 번쯤 타보길 권하는 이유 정도는 될 수 있겠다.

# 크루즈 여행은, 왜 즐거울까.

유람선이 대만 지룽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종일 항해를 하던 날이었다. 크루즈 5층 아폴로 그랜드홀에서 한 노부부가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입고 크루즈 전속 사진사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결혼 50주년 기념 웨딩 촬영이라고 했다. 딸이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에 맞춰 크루즈 여행을 예약하고, 트렁크에 턱시도와 웨딩드레스, 부케까지 모두 가져왔다고 했다. 촬영하는 노부부 주위를 둘러싼 승객들은 축하의 덕담과 함께 박수를 보냈다.

크루즈 여행은, 다른 여행과는 순도가 좀 다르다. 승객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년층의 경우라면 더 그렇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로 크루즈 여행에는 계기가 있다. 대부분 ‘관계’에 의해서 나오는 계기다. 노부부처럼 결혼기념일을 맞은 이도 있고, 졸업 몇 주년을 기념해 동창과 함께 온 경우도 있으며, 은퇴를 기념하는 경우도 있었다. 크루즈 여행은 소중한 이들의 시간을 기념하는 가장 훌륭한 여행 방식이었다.

‘버킷리스트에 가장 가까운 형태’의 여행이라 그럴까. 주로 노고에 대한 보상의 형태로 크루즈 여행을 택하는 이들이 많았다. 여행은 제법 호사스럽지만 이런 여행의 보상으로는 모자랄 정도의 고된 노고를 바치며 살아온 이들이 동행하는 여행이다.

크루즈 여행이라고 다 같은 건 아니다. 지중해나 카리브해쯤으로 가서 타는 크루즈 여행에서 한국인들이 즐거움을 느끼기는 어렵다. 언어와 문화의 높은 장벽 때문이다. 기항지 관광 쪽에 여행의 무게를 둔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만, 크루즈 여행의 중심이 ‘선상생활’인 걸 감안하면 해외로 가서 타는 크루즈는 아무에게나 권할 수 없다.

추천하는 건 한국을 모항(母港)으로 하는 ‘한국인을 위한 크루즈 여행’이다. 한국인끼리 가는 크루즈 여행에서는 도무지 지루할 틈이 없다. 배에서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루 종일 선상프로그램이 열린다. 대극장에서 열리는 콘서트와 뮤지컬 등 무대공연은 물론이고, 요가와 댄스강습부터 공예체험, 피자 만들기, 빙고게임, 탁구, 노래자랑, 영화감상, 와인 테이스팅, 기억력게임…. 심지어 이탈리아어 배우기 수업과 허리통증 완화 등의 강좌도 있다. 이런 프로그램의 내용과 시간표가 매일 밤 객실에 배달되는 선상신문에 빽빽하게 실려있다. 선상신문에 밑줄을 쳐가면서 승객들이 거리낌 없이 프로그램에 참여해 즐긴다.

놀라운 건 한국인들의 흥이다. 크루즈에서 ‘한국인이 얼마나 잘 노는지’를 보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노래자랑에는 참가자들이 줄을 서고, 댄스 플로어에는 참가자들로 넘쳐난다. 밥 먹다가도 종업원의 짧은 공연에 흥이 나면 다들 일어나서 합창하며 춤을 춘다. 선상 프로그램 참여 열기는 여정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더 뜨거워졌다. 수줍어하거나 낯을 가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승객들은 저마다 충분히, 아니 넘칠 정도로 크루즈의 선상생활을 즐겼다. 승객 모두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 배를 타고 가는 도시 여행

충남 서산의 대산항에서 출항한 코스타세레나호는 대만 지룽과 일본 나가사키에 머물며 기항지 관광을 한 뒤에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사실 기항지 관광은 일반 여행과 큰 차이가 없다. 사전에 투어를 신청해서 가이드와 동행할 수도 있고, 자유롭게 기항하는 항구도시를 돌아볼 수도 있다. 선상생활을 더 즐기느라 아예 배에서 내리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대만의 지룽이나 일본의 나가사키는 항구를 중심으로 발전한 도시라 배에서 내리면 바로 시내다. 별다른 안내 없이도 얼마든지 도보로 도시를 둘러볼 수 있다. 인상적이었던 건 두 곳 모두, 배를 타고 항구로 들어갔을 때의 느낌이, 과거 육로로 갔을 때와 전혀 달랐다는 점이다. 어쩐지 좀 더 깊은 도시의 속살을 들여다본 듯한 느낌이었다.

기항지 지룽에서 기차를 타고 타이베이까지 가봤고, 나가사키에서도 여러 곳을 둘러봤다. 그 얘기를 다 할 건 없겠고, 여기서는 지룽에서 찾은 황혼 나이의 크루즈 여행에서 떠올리는 추억과 겹쳐지는 느낌의 장소, 한 곳만 소개한다.

지룽항 뒤에 지룽역(基隆驛)이 있는데, 역의 등 뒤쪽 길 건너편에 2001년 문을 연 자그마한 카페가 있다. 상호는 ‘오래된 지룽 사진카페’다. 지룽 출신 대만의 저명한 사진작가 텐샹시(鄭桑溪·1937∼2011)의 아들 텐티엔 천(鄭天全·58) 씨가 운영하는 자그마한 커피숍이다. 커피숍에서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였던 아버지의 사진을 볼 수 있다.

#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손님

지룽에서 나고 자란 사진작가 아버지는, 생전에 항구도시 지룽과 탄광마을 지우펀의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그곳에 살던 이들의 모습이 흑백사진 속에 있다. 그의 렌즈는 어두운 골목과 쓸쓸한 부둣가 또는 탄광 마을을 겨누지만, 사진에서 전해지는 건 따스한 온기다.

그의 대표작은 1959년에 찍은 증기기관차 사진이다. 스타트 라인에 선 달리기 선수처럼 네 대의 증기기관차가 나란히 서 있고, 그 앞으로 어깨에 짐을 짊어진 짐꾼이 철로를 걷는 장면이다. 거대한 기관차와 짐을 멘 사람의 작은 크기의 대비가 어쩐지 뭉클하다. 사진은 사실주의적이면서 시적 감동이 있다.

이 사진이 카페의 주방 겸 카운터 위에 걸려있다. 2011년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젊은 날에 찍은 이 사진 뒤쪽에서, 늙어가는 아들이 커피를 내렸다. 아들이 내린 진한 커피가, 크루즈를 타고 한국에서 온 늙은 여행자의 테이블에 놓였다. 나라는 다르지만, 그들이 건너온 세월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었다.

카페에 누군가 걸어놓은 글귀는,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건네는 위로처럼 느껴졌다. “이곳은 카페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타임캡슐이기도 하다. 주인은 지룽의 아름답고 따듯한 과거, 지룽의 마지막 기억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

■ ‘종일 항해’의 선물

크루즈 운항 일정표를 보면 ‘종일 항해’ 시간이 있다. 다음 기항지가 멀어서 운항하는 배 안에 하루 종일 있어야 하는 날이다. 지루할 수도 있지만, 어찌 보면 이 시간은 크루즈 여행이 주는 선물과도 같다. 종일 항해하는 크루즈 안에서는 동행과 더 많은 시간 동안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크루즈 여행이야말로 추억을 함께 뒤져보는 데 가장 적합한 여행의 방식이라 할 수 있겠다. 친구 혹은 동창과 하는 크루즈 여행을 권하는 이유다.

박경일 전임기자
박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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