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토론
■ 김헌·김월회의 고전 매트릭스 - 한비자 ‘한비자’
위나라의 재상 ‘혜시’
상대 논리로 상대 설득
생산적이고 품격 갖춰
너무 기본적인 것
혼란 가중시키는 요즘
원래 취지와 정반대


춘추전국시대는 ‘말발’의 시대이기도 했다. 공자는 축타 같은 말발이 없으면 지금 같은 세상에서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탄식했다. 평소에 교언영색 하는 이 가운데 어진 이는 드물다며 교묘한 말주변을 비판하던 공자조차 말발의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정도였다.
말발이 행세하는 현상은 갈수록 만연했다. 제자백가의 시대는 학자들이 저마다 자신의 말발을 양껏 뽐냈던 시대이기도 했다. 이 시절 말발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했던 이들 가운데 장의라는 이가 있었다. 훗날 말을 종횡으로 치달으며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다는 점에서 ‘종횡가’라고 평가받은 인물이었다. 그가 하루는 위나라 왕 설득에 나섰다. 당시는 위나라를 비롯한 일곱 개 강대국이 상호 간에 동맹과 적대를 반복하며 중원의 패권을 놓고 무한경쟁을 벌이던 시절이었다.
장의는 위나라가 진나라, 한나라와 동맹을 맺고 또 다른 강대국인 제나라와 초나라를 치자며 왕을 설득했다. 당시 위나라에는 화려한 말발로 유명했던 이가 재상을 맡고 있었다. 바로 혜시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장의와 정반대로 제나라, 초나라는 공격 대상이 아니라 동맹 대상이라며 왕을 설득했다. 그런데 장의는 말발만 대단했던 것이 아니라 정치력 또한 빼어났다. 그는 이미 혜시를 제외한 위나라 조정의 신하들을 모조리 자기편으로 구워삶아 놓은 상태였다. 결국 뭇신하들이 장의 편을 들었고 왕은 이에 장의의 계책을 받아들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혜시는 왕을 따로 뵈었다. 왕은 혜시가 들어오자 말했다. “선생은 말하지 말라. 제나라와 초나라를 정벌하는 일은 정말로 이롭고 온 나라 사람들도 다 그렇다고 여긴다.”
그러자 혜시가 말했다. “제나라와 초나라를 치는 일이 정말로 이롭고 온 나라 사람들도 다 이롭다고 여긴다면, 이것이 어찌 지혜로운 자가 많아서이겠습니까? 토론함은 의혹이 있기 때문입니다. 의혹이란 옳다고 여기는 자가 절반이고 옳지 않다고 여기는 자가 절반인 것을 두고 말합니다. 왕께서는 왕의 결정을 온 나라 사람들이 옳다고 여긴다고 하시는데 실은 이는 왕께서 절반을 잃으신 것입니다.”
이 고사를 전해준 ‘한비자’에는 이 이후의 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우리는 여기서 토론의 기본을 목도할 수 있다. 바로 상대방의 논리에 입각해서 상대방의 주장을 깬다는 전략이 그것이다.
혜시는 제나라, 초나라와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자기주장에 기초하여 왕을 설득하려 하지 않고, 왕의 논리에 입각하여 왕을 설득했다. 그러니까 제나라, 초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이롭다는 왕의 판단에서 논의를 시작하고, 그런 판단 탓에 백성의 절반을 잃는 결과가 초래됐음을 들어, 왕의 판단이 잘못됐음을 지적하였다. 자신의 논리에 기초하여 상대방의 논리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논리로 상대방의 주장이 잘못됐음을 입증하는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이것이 토론이 생산적이고 품격을 갖추게 되는 길의 하나다. 물론 이는 너무 당연하고 기본적인 것 아닌가 싶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세 차례나 진행된 대통령 후보들의 TV 토론을 짚어보자. 과연 이 기본이라는 것이 한 번이라도 제대로 구현된 적이 있는지를 말이다. 토론은 본래 싸우는 일과 거리가 한참 멀다. 토론의 토(討)는 ‘다스리다’라는 뜻이고 규범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분란이나 갈등 따위가 일어나면 이를 규범에 맞게 다스려 정리하는 활동이 바로 토였다. 토론의 논(論)은 ‘조리를 세워 마땅하게 말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논도 싸움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그래서 토론이 제대로 수행되면 갈등과 혼란 따위를 해소할 수 있게 된다. 지금처럼 토론을 하면 있던 갈등은 더욱 증폭되고 없던 갈등마저 새로 생겨나 혼란이 가중되는 것은 토론의 원뜻이나 취지와는 정반대된다. 하기야 이천수백여 년 전 사람들도 능히 행할 줄 알던 토론의 기본조차 행할 줄 모르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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