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에 축조된 경주읍성은 형산강(서)-남천(남)-북천(북) 세 하천으로 둘러싸인 완전 평지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아 풍수 점수를 매기면 0점이다. 하지만 세종 때부터 시작돼 조선 후기에는 풍수가 고을의 중심지와 관아의 권위 표현에 절대적인 기준이 되자 어떻게든 풍수의 명당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그렇다고 풍수의 명당 형국을 찾아 읍성을 옮기지는 못하고 대신 지기(地氣)의 흐름인 지맥을 새롭게 인식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경주의 읍지인 ‘동경잡기(東京雜記)’(1669) 산천 항목의 명활산 부분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명활산 아래에 언덕이 있어 이름을 한지원(閑地原)이라 했는데, 곧 읍성의 내맥(來脈)이다. 옛날부터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었는데, 1522년쯤부터 백성들 다수가 함부로 경작하여 산맥을 파서 끊어 물을 끌어다가 논에 대었다. 1623년쯤에는 사리역의 역졸이 역마를 기르기 위한 마위전(馬位田)을 백성들의 토지와 바꾸어 얻어서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거주했다. (그런데) 올해(1669) 고을 사람들이 그 내맥을 상하게 함이 있다는 소장을 관청에 올려 감사(監司)에게 옛 사리역을 철거하여 옮겨 달라고 신청했다.’

이야기의 전제는 경주 시내 동쪽 명활산의 지기가 한지원이란 작은 언덕을 타고 내려와 읍성까지 연결된다는 인식이다. 그런데 1522년과 1623년쯤 두 차례에 걸쳐 한지원의 내맥을 손상시키는 일이 발생했음에도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다가 1669년에서야 내맥을 회복시켜 달라는 소장이 감사에게 접수됐다. 경주읍성에 대한 풍수 인식이 이때쯤 형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풍수에 대한 인식이 아주 오래됐을 것이라는 선입견보다 많이 늦은 시기다.

경주읍성의 풍수 점수는 0점이기 때문에 아무리 정교한 풍수의 논리를 개발하더라도 100점이 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주산-좌청룡-우백호-안산이란 풍수 요소와 전혀 관련이 없는 다양하고 창조적인 비보풍수 이야기까지 만들어 치열하게 노력했다.

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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