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면이 하천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들어선 경주읍성처럼 주산-좌청룡-우백호-안산 어느 하나도 갖추지 못한 풍수 점수 0점인 지역에서는 네 요소 중 일부를 조산(造山)이나 비보숲으로 만들어 보충하더라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이들 요소가 전혀 등장하지 않거나 아무런 상관이 없음에도 들으면 마치 풍수의 의미 구조가 듬뿍 담겨 있는 이야기처럼 빠져드는 별의별 비보풍수를 만날 수 있다. 그중 하나인 ‘동경잡기’(1699)에 수록된 경주부윤 권이진(1668∼1734)의 ‘동경잡기간오(東京雜記刊誤)’에 이렇게 전한다.

‘봉황대 근처에 조산이 30여 개인데, 언제 만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고려 때 최충헌(1149∼1219)은 나라 안의 산천에 (수도 개성을) 등지면서 달려가는 (반역의) 형세가 많다는 풍수 전문가의 말을 듣고 비보특별위원회(裨補都監)를 설치해 12년 만에 곳곳에 산을 만들고 돈대를 쌓아 그것(반역의 형세)을 이겨 내려 했다. 경주는 옛 나라의 터전으로서 자주 반역했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으니 이때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혹은 신라 때 만들어 지리를 비보했는지도 모르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 모두 알지 못하겠다.’

경주읍성 남쪽에는 두 번째로 큰 신라 고분인 봉황대가 있고, 그 주변과 남쪽에는 가장 큰 황남대총을 비롯해 거대한 신라 고분이 즐비하다. 이들을 인위적으로 만든 조산이라고 보고 언제 왜 만든 것인지 추적하면서 풍수를 슬쩍 끌어들이고 있다. 고려 무신정권 당시 경주에서는 신라 부흥을 기치로 여러 차례 반란이 일어났고, 최충헌이 집권하던 1202년과 1204년에 마지막 반란이 진압됐다. 비슷한 시기에 최충헌은 비보특별위원회를 설치해 운영했는데, 두 역사적 사실을 결합하여 경주에서 반역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만든 비보풍수의 조산일지 모른다고 설명하고 있다.

주산-좌청룡-우백호-안산이란 풍수의 용어는 하나도 나오지 않는데, 다 읽고 나면 마치 정교한 풍수 이야기인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든다.

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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