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민의 정치카페 - 이재명 정부와 ‘통합’

 

李, 3특검 공포로 ‘윤석열 유산’ 청산 시작… 민의 앞세워 ‘빛의 혁명=내란 종식’ 강조

과잉 청산은 정권 신뢰 떨어트리고 국민통합 방해… 권력이 가진 최고의 툴은 관용과 자제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모든 국민을 섬기는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라고 했다. 국민통합을 염두에 둔 말이다. 하지만 과거 청산이라는 혁명적 임무와 통합이라는 국민적 요구가 만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 대통령의 시국 인식이 완강할 뿐 아니라, 완장 찬 지지자들의 열망이 워낙 강력해 권력의 자제를 기대하기가 녹록지 않아 보인다.

◇청산과 통합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때 가장 먼저 꺼낸 화두는 통합이었다. 그는 4일 취임사에서 “저는 이제부터 모든 국민을 섬기는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진보의 문제도, 보수의 문제도 없다. 오직 국민의 문제, 대한민국의 문제만 있을 뿐”이라며 포용적 국정 운영을 할 것임을 천명했다. “남녀·세대·지역·직업·장애 여부를 막론하고 서로를 증오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나라를 만들겠다”라고도 했다.

하지만 통합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현재는 늘 과거와 싸워야 할 과제를 부여받는다. 1987년 체제 이후 대한민국의 역대 정권은 대부분 청산과 통합의 긴장 관계 속에 자신의 임기를 보냈다. 집권과 동시에 과거사와 싸우고 전 정권이 남긴 레거시에 대한 청산 작업에 돌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김영삼 정권은 역사 청산과 군부 독재 청산을 책무로 삼았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역시 과거 청산과 기득권 청산에 매달렸다. 박근혜 정권은 종북 청산을, 문재인 정권은 보수 대청소를 통한 주류교체를 부르짖었다. 윤석열 정권은 반국가 세력 척결에 소임을 두는 듯 보였다. 과거 청산은 대통령 단임제를 유지해온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하나의 아비투스(habitus·습속)로 자리 잡았다.

이 대통령과 집권 더불어민주당의 과거 청산에 대한 입장은 분명하다. 민주당이 주도하는 국회는 이 대통령 취임 다음 날인 5일 내란·김건희·채상병 등 3개 특검법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이 대통령이 10일 국무회의에서 특검법안들을 공포하면서 윤석열 정부의 유산에 대한 대대적인 청산이 본궤도에 올랐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3 계엄 사태 이후 6·3 대선까지의 선거운동 기간 내내 ‘내란 극복’을 외쳤고, 취임사에서도 ‘내란 청산’을 못 박았다. 역대 그 어느 정권의 과거 청산보다 강력하고 광범위하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는 이 대통령의 청산 작업은 필연적으로 국민통합과의 갈등을 예고한다.

◇디킨스의 고뇌

국민이 투표로 선출한 현직 대통령을 탄핵한 건 혁명적 사건이다. 박근혜 탄핵은 ‘촛불혁명’으로, 윤석열 탄핵은 ‘빛의 혁명’으로 불렸다. 혁명의 동인으로 보자면 최순실 국정농단보다 군사계엄이 훨씬 강력하다.

이 대통령은 6·3 대선 투표일 하루 전 여의도 유세에서 “빛의 혁명을 완수하겠다”고 했다. 이어 취임사에서는 보다 정제됐지만, 한결 서늘한 언어로 혁명 과업의 완수를 천명했다. “국민이 맡긴 총칼로 국민주권을 빼앗는 내란은, 이제 다시는 재발해선 안 됩니다. 철저한 진상 규명으로 합당한 책임을 묻겠습니다.…위대한 빛의 혁명은 내란 종식을 넘어 빛나는 새 나라를 세우라고 명령합니다.” 혁명 과업의 수행은 그에게 최고의 임무가 됐다.

문제는 혁명기의 청산 작업은 종종 통합 과제와 부닥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프랑스혁명을 소재로 한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는 이 점이 절절하게 묘사돼 있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었다.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고, 믿음의 세기이자 불신의 세기였다. 빛의 계절이면서도 어둠의 계절이었고, 희망의 봄이지만 절망의 겨울이기도 했다.’

디킨스의 글에는 혁명의 완장을 찬 이들의 ‘과잉 청산’ 행태가 생생하게 묘사됐다. ‘매일 자갈길 위로 사형선고를 받은 자들을 가득 실은 호송마차가 덜컹거리며 지나갔다. 자유·평등·박애가 아니면 죽음이리라! 특히 마지막, 죽음을 가장 쉽게 바치는 것은 바로 기요틴(단두대)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천국을 향해 가고자 했지만 그들은 모두 엉뚱한 방향으로 걸었다.’

청산이 ‘자제의 옷’을 입지 못할 때 어떤 비극이 벌어지는지는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에서도 발견된다. 버크는 ‘새로 지은 사회는 부숴버린 사회보다 우월한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기요틴을 숭상하는 혁명가들에 대한 냉소였다.

◇청산의 원칙

청산은 첫째 전광석화처럼, 둘째 핀셋 청산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필자는 이와 똑같은 제언을 윤석열 정부 집권 직후에도 했었다.(문화일보 2022년 7월 7일자 ‘허민의 정치카페’)

첫째, 전광석화의 원칙. 청산이 늘어지고 지지부진하면 효과가 없고 국민적 피로감을 높이며 필연적으로 사회 분열을 부른다. 권력자가 과잉 청산을 벌이면 돌아오는 건 국민의 지지와 신뢰 상실이다. 새 정부의 청산을 위한 적절한 시한은 임기 시작 후 1년 정도이다. 과거사와 전임 정권에 대한 적폐청산을 전광석화처럼 하되, 한편으로는 국민통합을 준비해야 한다.

둘째, 핀셋 청산의 원칙. 주류세력 교체라는 정치적 목표가 개입돼 국민을 우(友)와 적(敵), 내 편과 네 편, 빛과 어둠으로 갈라치기 하고 반대편에 대한 인종청소를 벌인다면, 그 결과는 극도의 국민 분열일 수밖에 없다. 핵심 인물과 대상을 최소화해 이른바 외과수술식 정밀타격을 통해 핀셋 사정을 해야 고질적인 정치보복 논란도 최소화될 것이다.

윤석열 정권은 전임 문재인 정권의 과오에 대한 청산 작업에 게을렀고 이는 개혁의 실패를 불렀다. 반면 문 정권은 집권 5년 내내 적폐청산에 매달렸고 결과는 국민의 극단적인 분열이었다. 윤 정권은 청산 회피의 오류, 문 정권은 청산 과잉의 오류를 범했다.

이 대통령에겐 전광석화와 핀셋 청산의 원칙에 더해 ‘자기청산’을 해야 할 과제가 있다. 그건 지난 몇 해 동안 8대 사건 12개 혐의로 5개 재판을 받아왔던 것과 관련 있다. 그가 2022년 대선에서 실패한 이후 끊임없이 대권을 향해 질주해온 건 자신의 사법 방탄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권이 대통령에 대한 형사재판 중단법과 공직선거법 위반 면소법, 판검사 법리왜곡죄 처벌법, 대법관 증원법 등을 추진하는 한 자기청산은 어렵다. 이는 또 다른 국민 분열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역사와 반면교사

역대 정권이 겉으로는 여론과 민의를 앞세워 청산 작업을 벌였지만, 진짜 목적은 정적 제거와 자파 장기집권일 경우가 많았다. 과잉 청산은 국민통합에 역행한다. 통합을 추구하는 권력의 가장 좋은 툴은 관용과 자제다.

전임기자, 행정학 박사

■ 용어 설명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은 에드먼드 버크가 1790년 출간한 정치 팸플릿. 근대 보수주의 사상의 토대를 마련함과 동시에 버크 사상의 최고봉으로 평가받게 된 계기를 마련.

‘두 도시 이야기’는 1859년 출간된 찰스 디킨스의 역사소설. 프랑스혁명을 배경으로 파리와 런던 두 도시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담아내며 혁명의 이면을 통찰.

■ 세줄 요약

청산과 통합: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때 가장 강조한 화두는 국민통합이지만 통합이 말처럼 쉽지는 않아. 현재는 늘 과거와 싸워야 할 과제를 부여받기 때문. 청산 작업은 필연적으로 국민통합과의 갈등을 예고.

디킨스의 고뇌: 국민이 투표로 선출한 대통령을 탄핵한 건 혁명적 사건. 문제는 청산이 종종 통합과 부닥친다는 것. 디킨스의 글에는 혁명의 완장을 찬 이들의 ‘과잉 청산’ 행태의 이면과 부작용이 생생하게 묘사돼.

청산의 원칙: 과거사 혹은 전임 정권에 대한 청산은 전광석화처럼, 핀셋 청산 방식으로 이뤄져야. 청산이 지나치면 정치보복이 되며 이는 국민통합에 역행. 통합을 추구하는 권력의 가장 좋은 툴은 관용과 자제.

허민 전임기자
허민

기사 추천

  • 추천해요 1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4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