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희 정치부 차장

이재명 정부 초대 국무총리로 지명된 김민석 후보자는 지난 5일 출근길에 보수당을 상징하는 빨간색 넥타이를 맸다. 넥타이 색깔에 대한 질문이 나오지 않자 “기자들이 왜 묻지 않았을까요”라고 되묻기도 했다. 취임식에선 이재명 대통령과 김 후보자가 약속이나 한 듯 파란색과 빨간색, 흰색이 교차된 넥타이를 매고 등장했다. 새파란 넥타이의 문재인 전 대통령, 하늘색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아닌 빨강·파랑·하양 삼색 넥타이를 맨 DJ의 방식이다.

32세에 국회의원에 당선돼 누구보다 높이 올라가 봤고, 누구보다 깊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쳐 봤던 사람. 18년간의 야인 생활, 국회 복귀와 이재명 대통령 당선 조력까지, 김 후보자를 관통하는 말은 ‘중도 보수 통합론’이다. 민주당과 극우 수구 세력을 제외한 중도 세력과의 연합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낭만적인 통합론이 아니다. 민주당 정권을 위한 가장 확실한 승리 공식이 중도 보수와의 연합이라고 김 후보자는 믿었다. 그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2002년 대선 노무현·정몽준 단일화였다.

그는 정몽준이라는 반(反)이회창·비(非)노무현 세력과의 결합, 정통적 민주 진보 세력과 탈정치의 무당파 세력 간 연합 정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정몽준 지지층을 잡지 않고서는 대선 승리를 자신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한 달 내내 ‘단일화’를 입에 달고 살던 김 후보자는 대선을 두 달 앞두고 전격 탈당했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의 탈당이 당시 꺼져가는 야권 단일화에 숨을 불어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엄청난 비난 속에 추락했지만, 그는 바닥에서 퇴수(退修·조용히 물러나 내공을 닦는 것)를 이어갔다. DJ는 “오래 정치할 사람이니 퇴수를 잘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김 후보자는 2002년 지방선거(서울시장), 제17·20대 총선에서 연거푸 낙선했다. 그러면서도 미국과 중국 등지를 돌며 쉬지 않고 공부했다.

‘86세대의 황태자’였던 김 후보자가 줄곧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나 한미동맹, 제주 해군기지 등의 현안에 대해 정통 민주 세력과는 다른 입장을 취한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그는 여느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의 관념적 진보 노선을 누구보다 강하게 비판해왔다. 야인 생활을 끝내고 국회로 복귀해서도 그의 관심은 정통적 민주당 정체성과는 거리가 있었다. 유류세 인하, 대학생 ‘1000원 아침밥’처럼 좌우 이념과 상관없는 정책에 그는 주력했다. 실제 이번 대선에서 이재명 대통령 승리를 견고하게 뒷받침한 것은 정권교체를 지지해온 중도층과 합리적 보수들이었다.

이런 사람이 국무총리에 지명됐다는 사실을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은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벌써 국민의힘 주변에는 ‘이재명 헛발질로 다음 총선에선 기회가 온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수두룩하다. 공천권을 두고 서로 치고받는 당권 경쟁도 그런 김칫국의 일환이다. 이 대통령과 김 후보자는 앞으로 ‘중도 보수론’을 더욱 공격적으로 확장할 것이다. 취임식에 등장한 삼색 넥타이가 그 예고편이다. 국민의힘이 오늘의 모습에 안주한다면 손바닥만 한 우익 정당으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김윤희 정치부 차장
김윤희 정치부 차장
김윤희 기자
김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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