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잎마다/ 심연에 도착했던 부분이 있다네/ 꽃잎마다/ 지상으로 심연을 이끌고 온 색깔이 있다네// 나의 어떤 부분은 고요.’
- 송재학 ‘꽃잎마다 너라는 잔상’(시집 ‘습이거나 스페인’)
여름 장미가 화사한 요즘이다. 덩굴 앞에는 어김없이 한두 사람이 서 있고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이제 꽃 사진을 찍어도 민망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어.” 한 선배의 자조 섞인 농담이 떠올라 웃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수상하다는 듯 힐끔거린다. 걸음이 바빠진다.
어릴 적 장미란 겹겹 꽃잎 속 풍뎅이를 숨겨놓은 꽃. 줄기서 자라난 가시를 뜯기도 했다. 접면에 침을 발라 코에 얹으면 코뿔소. 쫓고 쫓기며 한참을 놀았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예쁘다 아름답다 그런 건 모르고 괴롭히기만 했을 뿐이다. 20대에 장미는 누가 뭐래도 꽃다발. 용돈을 탈탈 털어 백 송이 장미를 샀던 적이 있다. 생각보다 너무 커다란 묶음이어서 낭만이고 뭐고 끙끙거리며 들고 걷기 바빴던 기억에 얼굴이 절로 빨개진다. 30대의 기억엔 장미가 없다. 일하느라 바빴지. 그런 게 좋았고. 주변을 둘러볼 틈도 없이 내처 달렸던 것 같다. 이 역시 별로 떳떳한 시절은 아니었지 싶고. 마침내 40대가 된 이제야 나는 장미를 살피게 된다. 장미마다 이름이 제각각이라는 것도 이제는 안다. 어딘가 내 정원을 마련해 장미를 키워보고도 싶다. 아무 목적도 없이 들여다보고 어쩜 이렇지. 이런 색이 가능하지. 이렇게 피어나지. 감탄을 할 수 있게 된 지금이 좋다는 선배의 농담을 이해하게 되네, 조금 쓸쓸해지기도 하고.
단독주택 담벼락을 수놓고 있는 장미 덩굴을 발견한다. 다가가 꽃잎을 헤쳐 본다. 풍뎅이는 보이지 않는다. 꺾어 사랑하는 이에게 선물하고 싶은 마음도 이제는 들지 않는다. 그저 이건 어떤 종일까. 이름을 불러주고만 싶다. 주변을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한 장 남긴다. 여지없구나. 한 장 더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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