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미 논설위원

인공지능(AI)시대, 이를 다룬 우리 이야기가 연이어 세계적 러브콜을 받고 있다. 근미래, 폐기된 구형 헬퍼봇의 사랑을 담은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토니상 6관왕에 올랐다. 앞서 천선란 작가의 SF 소설 ‘천 개의 파랑’은 미국 워너브러더스와 6억 원대 판권료로 영화화 계약을 맺었다. 아직 감독이 정해지지 않았지만 그레타 거윅, 알폰소 쿠아론 등 쟁쟁한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이 역시 근미래를 배경으로 쓸모를 다한 구형 휴머노이드 기수 콜리와 소녀 연재 이야기다.
로봇을 포함해 AI를 다룬 SF의 역사는 길다. 신화적 기원은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청동 거인 탈로스, 현대적 원조는 1818년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다. 이어 로봇이라는 신조어를 만든 카렐 차페크의 ‘R.U.R.’(1920), 로봇 3원칙에 빛나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1950) 등이 대중적 관심을 일으켰다. 그 뒤 복제인간이 등장한 ‘블레이드 러너’(1993), 가상 현실을 다룬 ‘매트릭스’(1999), 드디어 AI를 사랑하게 되는 ‘HER’(2014)로 이어졌다. 이제 AI시대로 들어섰으니 이 같은 이야기는 폭발적으로 쏟아질 것이다.
이런 시점에 세계적 선택을 받은 ‘어쩌면 해피엔딩’과 ‘천 개의 파랑’은 특별한 공통점을 보여준다. 서구 AI 서사가 주로 ‘인간 대 기계’의 대결, 통제와 지배 같은 권력 문제에 집중해온 것과 달리 두 작품 속 AI는 인간과 싸우지 않는다. 오히려 폐기될 운명의 로봇은 똑같이 상처 입은 인간과 마음을 나누며 또 다른 약자로 등장한다. ‘강한 인간 대 강한 기계’의 대결이 아닌 ‘약한 존재들의 연대’, ‘시스템 고발’이 아닌 ‘개인들의 연민과 응원’이다. ‘천 개의 파랑’ 속 기수 콜리는 쇠약한 경주마 투데이를 위해 스스로 낙마하고 ‘어쩌면 해피엔딩’의 헬퍼봇들은 시스템에 맞서는 대신 반딧불이를 보러 간다. SF 설정과 소재를 가져왔지만, SF라기보다는 오히려 ‘한국식 멜로 드라마’로 마음을 파고든다. 장르적으로 기계 문명의 역사와 SF 전통이 약한 탓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한국 서정의 전통과 경쟁에 지친 지금 이곳의 감정이 더해진 결과이다. 기계 문명 속 인간의 가치를 되묻는 시대적 큰 질문에 답하며 한국식 서정적 SF가 세계인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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