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욱 숙명여대 석좌교수, 前 민주평통 사무처장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
손자병법 오해하면 국가 멸망
‘더러운 평화’는 백기 투항 뜻
李 “함께 사는 게 진정한 안보”
철학 아닌 현실에서는 미지수
북핵 경시한 협력은 가짜 평화
손자병법에 대한 오해는, 전쟁을 반대하고 무조건 평화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2500여 년 전 중국 춘추전국시대 전략가인 손무는 ‘손자병법’ 모공(謀功)편에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이라고 강조했다. 무력 사용은 결국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므로, 적의 목표를 먼저 좌절시키는 노력을 하고, 안 되면 외교 수단을 동원하며, 실패하면 최종적으로 군대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쟁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일 뿐이라는 손자의 시각을 곡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전쟁이 능사가 아니지만 때때로 불가피하다며 승리 전략과 전술을 개발하는 데 골몰했다. 오히려 실전에서는 공세와 세력 확대에 중점을 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소국은 타국을 공격하긴커녕 강대국의 공격을 막기에 급급했다. 강대국조차 싸우지 않고 약소국을 병합하려 했다. 약소국은 두 가지 선택에 직면한다. 우선, 기개를 내세워 싸워보는 것이다. 그나마 이순신 장군과 같은 불세출의 영웅이 있으면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다’고 마지막까지 버텨 보는 것이다. 다음은, 국력의 역부족을 절감해서 ‘더러운 평화’를 택하고 초반에 백기 투항하는 것이다. 조선 시대 선조는 도피하고 백성은 쑥대밭이 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일제강점기의 스토리가 해당한다. ‘더러운 평화’를 택한 나라는 마침내 멸망으로 이어지는 등 국민에게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각각 일본과 청으로 끌려간 사람만 수십만 명이었다. ‘더러운 평화’는 단순 백기 투항으로 끝나지 않고 모욕과 굴욕을 당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6·3 대선이 끝나고 새 정부가 들어섰다. 유세 기간에 “비싸고 더러운 평화도 이긴 전쟁보다는 낫다”는 이른바 ‘더러운 평화 우위론’이 제기됐다. 주요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싸워서 이기는 것은 필요하지만 하책이다. 진짜 확실한 안보는 싸울 필요가 없는 상태, 즉 평화를 만드는 것”이다.
1920년대 블라디미르 레닌 정부에서 외교장관을 했다가 숙청당한 사회주의자 레온 트로츠키는 “나는 전쟁에 관심이 없는데 전쟁이 나에게 관심이 있다”고 했다. 현실주의 이론에 기반한 국제관계를 정확하게 간파했다. 19세기 프로이센의 전략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전쟁은 하나의 정책 수단이라고 규정했다. 전쟁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누가 전쟁을 택하겠는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2022년 우크라이나가 백기 투항을 했으면 침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유세 기간 “싸울 필요가 없는, 싸울 걱정이 없는 평화 상태를 만들기 위해 강력한 억지력이 필요하다”고 그럭저럭 중심을 잡았다. 하지만 우려는 여전하다. “서로 공격하지 않고, 위협하지 않고, 함께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가게 하는 게 진정한 안보다”라는 관점은 철학적으론 타당할지라도 현실에선 미지수다.
유세에서 나온 발언과 취임 이후 정책 집행에서는 차이가 있어야 한다. 재래식 무기 세계 5위라는 왜곡된 통계에 집착해 북한의 핵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평양 핵의 타격 목표는 워싱턴이나 도쿄가 아니라 서울이라는 사실은 국민주권시대에도 불변이다. 최근 영변에서 포착된 신규 북핵 시설은 기하급수적인 핵무기 증가를 겨냥한 것이다. 핵무기 집단인 북한의 군사 도발에 굴복하지 않고 협력과 대화만으로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를 정착하는 방안이 있다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희망하는 진짜 노벨 평화상 수상이 가능할 것이다. 대화가 만능의 요술 방망이라면 손자, 트로츠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오류일 것이다.
전쟁론 권위자들의 판단은 지금도 우크라이나와 중동 전선에서 유용하게 검증된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가 요구하는 ‘더러운 평화’를 수용했다면 참상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정은 무지몽매한 발상이다. ‘더러운 평화’가 현실에서 작동되지 않기 때문에 ‘깨끗한 전쟁’이 불가피한 점은 역사의 교훈이다. 전쟁과 평화라는 단어 앞에 붙는 형용사는 불필요하다. ‘더럽고(dirty)’ ‘깨끗한(clean)’이라는 수식어는 무기력한 현실을 합리화하는 사족에 불과하다. 생사와 존망이 걸린 전쟁과 평화는 죽음과 삶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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