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종 논설위원

 

보수주의 철학의 핵심은 책임

계엄 탄핵 대선패배에 무책임

국힘 지지율은 여당 절반 추락

 

과거 보수세력은 전략적 판단

부정선거 음모론이 책임 가려

내년 지방선거 패배도 불 보듯

국민의힘은 월 1000원의 당비를 내는 당원을 ‘책임당원’이라고 한다. 더불어민주당이 ‘권리당원’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르다. 보수주의 철학의 핵심 가치인 ‘책임’을 강조한 것으로, 법과 질서에 대한 존중과 국가와 시민의 책임을 부여하는 의미다. 그런데 지난해 12·3 계엄과 탄핵, 그리고 대선을 거치면서 국민의힘 그 어느 곳에서도 책임을 찾을 수가 없다. 망상에 사로잡혀 보수를 궤멸시키고 정권을 넘겨준 제1 책임자인 윤석열 전 대통령은 여전히 이재명 대통령과 민주당 탓만 하고 있다. 또 ‘배신자 한동훈 탓’만 되풀이하고 있다.

‘친윤’ 마패를 들고 설치던 이들은 “지금은 단결할 때”라며 화살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피하기에 급급하다. ‘친윤’의 대표 격인 권성동 전 원내대표는 퇴임하면서도 자신은 나름대로 윤 전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했다고 변명하고 있다. 한 전 대표에겐 “소통을 더 열심히 하라”고 했다. 어릴 적부터 친구인 윤 전 대통령에겐 이런 충고를 한 번이라도 했는지 의문이다. 원내대표 경선에 나선 송언석 의원과 이헌승 의원은 열심히 대통령 관저 앞을 지키더니 이제는 친윤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사도 베드로가 예수를 3번이나 부인한 격이다. 친윤은 당을 살려보겠다고 악전고투하는 최연소 90년생 김용태 비대위원장마저 쫓아내려 하고 있다. 박수민 의원이 시작한 사과 릴레이도 최수진·최형두 의원 등 3명으로 그치며 더 이상 참여하는 인사가 없다.

국민의힘을 그나마 보수 정당의 맏형이라고 인정해 주었던 국민은 이런 행태에 지지를 철회하고 있다. 한국갤럽이 지난 10∼12일 조사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힘 지지율은 21%로 민주당 46%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전 연령대와 대구·경북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민주당에 뒤졌다. 비상계엄 발동 직후 24%보다도 낮다. 산술적으로 보면 대선에서 김문수 후보에게 표를 주었던 41.15% 중 반이 빠져나간 것이다.

보수 정당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쇼’라고 비난받을지라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며 위기를 탈출했다. 2002년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이 일부 기업으로부터 수백억 원의 비자금을 받은 ‘차떼기’ 사건으로 국민 지지가 바닥을 쳤다. 2004년 3월 새 지도부가 된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당사를 매각하고 여의도 공원 맞은편에 ‘천막당사’를 쳤다. 4월 총선에서 참패가 예상됐던 상황에 읍소 전략의 일환이었지만 이런 ‘사과 쇼’에 민심이 움직여 121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나마 보수 진영 내부의 집단 지성이 작동해 전략적 접근을 한 결과다.

그러나 21대 총선에서 황교안 대표가 이끌던 미래통합당이 참패한 이후 제기된 부정선거론이 보수 진영을 휩쓸면서 ‘책임’이라는 보수의 가치는 점점 퇴색되고 음모론이 잠식하게 된다. 부정선거론이 보수 전체에서 소수였지만 윤 전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파산을 합리화하기 위해 부정선거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면서 이를 신봉하는 이들의 비중이 크게 증가했다. 이번 대선이야말로 보수의 전략적 판단이 흐려진 대표적인 사례다. 계엄과 탄핵으로 치러지는 선거에서 당연히 이런 프레임에 벗어나는 인물을 대선 후보로 내야 하는 것이 상식인데 친윤과 ‘윤어게인’ ‘부정선거’ 옹호 세력들이 김문수·한덕수 후보 단일화 전략으로 보수 지지자들의 판단을 흐리게 한 결과 선거 패배로 이어지고 말았다. 대선 패배 이후에도 잘못된 전략에 앞장선 윤상현·나경원·김기현·권영세·권성동 등 중진들의 행태는 달라진 것이 없다.

이재명 정권과 민주당의 눈은 이미 내년 6월 지방선거를 향하고 있다. 인물도 키우고 있다. 입법·행정 권력을 다 차지했지만 아직 배가 고픈 모양이다. 하기야 저렇게 무기력하고 무전략인 제1야당이 있는데 지방선거에 욕심이 없다면 정치집단이 아니다. 광역단체장·기초단체장·지방 의원은 정권의 풀뿌리 세력에 직업을 제공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이 선전해 지방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내년 선거는 암울하다. 민주화 이후 압도적 권력을 가진 정권의 탄생이 눈앞에 있다. 뜨거운 물 속의 개구리처럼 점점 죽어가는데도 모르는 불감증이 문제다. 선거 참패 뒤 또 부정선거를 주장할 것인가.

이현종 논설위원
이현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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