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숙 논설위원

미국의 지한파 외교관인 데이비드 스트로브(71)는 1979년부터 5년간 한국에 근무하며 1980년 서울의 봄 전후 한국의 정치 상황을 지켜본 인물이다. 그는 주한미국대사관 정무과장, 국무부 한국과장 등을 지낸 뒤 펴낸 ‘반미주의로 본 한국현대사’에서 ‘1980년대 한국의 반미주의는 심각했다’면서 1983년 리처드 워커 주한 미 대사와 노태우 내무부 장관의 면담 내용을 이렇게 기록했다.
‘워커 대사가 대규모 학생 시위를 우려했지만, 노 장관은 한국에 반미주의가 전혀 없다고 했다. 그러자 워커 대사는 노트에 무언가 적어 노 장관에게 건넸는데 우물 안 개구리를 뜻하는 한자어였다.’ 스트로브는 19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 사건에 대해 ‘일군의 대학생이 점거 후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한 일이 있었다’고 쓴 뒤 ‘이 시기 많은 한국 학생은 급진적이었다’고 회고했다.
서울 미문화원 점거 사건은 광주와 부산, 대구 미문화원 방화 및 사제 폭탄 투척 사건 등에 이어 발생했다는 점에서 우발적 사건이 아니다. 스트로브의 관찰대로 반미 투쟁의 연속선 속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서울 미문화원 농성을 기획한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던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는 지난 10일 반미주의 의혹에 대해 즉답을 피한 채 “미국에서 공부를 했고 미국 헌법에 관심이 있어서 미국 변호사 자격도 가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에 대해 “사실상 최초로 광주 문제를 세계에 알리기 위한 효율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제기했던 과정”이라고 얼버무렸다. 반미(反美)가 아니라, 광주를 위한 행동이라는 논리다.
조희연 전 서울시교육감이 박사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펴낸 저서 ‘현대 한국사회 운동과 조직’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유화국면 이후 학생운동의 선도적 투쟁은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에서 정점에 이른다. 이 농성은 반독재민주화운동세력이 반외세자주화운동세력으로서 대중 앞에 자신을 드러낸 계기가 됐다(p.126).’ 서울 미문화원 사건이 반미운동의 신호탄이라는 주장이다. 1980년대 대학가의 반미는 워커 전 대사 증언이나 조 전 교육감 연구대로 역사적 사실이다. ‘독재 극복에 불가피했지만, 현재의 잣대로는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고 하면 될 것을 회피하려는 것은 과거 자체를 지우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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