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정공연-맥(脈)을 이음’으로 고별무대… 가수 이미자

 

전통가요엔 서민들 희로애락 담겨… 恨의 정서 가장 잘 표현

‘꺾기 창법’ 가장 싫어해… 기교부터 부리려는 요즘 안타까워

 

박춘석은 피아노·백영호는 기타로 작곡… 많은 영향 준 스승

나도 작사 시도했지만 결국 못써… 사람은 자기 주제 알아야

제 노래 금지곡 됐을 때 ‘수준 낮다’ 편견… 가슴 아팠던 기억

66년간 ‘전통가요 지킴이’로 살아온 가수 이미자는 지난 4월 자신을 위한 ‘고별무대’가 아닌 전통가요를 위한 ‘헌정 공연’으로 긴 활동의 마침표를 찍었다.  쇼당이엔티 제공
66년간 ‘전통가요 지킴이’로 살아온 가수 이미자는 지난 4월 자신을 위한 ‘고별무대’가 아닌 전통가요를 위한 ‘헌정 공연’으로 긴 활동의 마침표를 찍었다. 쇼당이엔티 제공

지난 11일, 서울 서래마을의 한 카페에서 가수 이미자(84)를 만났다. 그의 자택 인근이다. 지난 4월 2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그의 고별 공연을 마친 후 45일 만이었다. 한사코 인터뷰를 마다하는 그를 조르고 또 졸랐다. “66년 가수 인생에 마침표를 찍은 사람과 왜 굳이 만나려 하느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전통가요의 맥을 잇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그에게 “왜 그 맥을 이어야 하는지 듣고 싶다”고 답했다. 얼마 후 “만나자”는 답을 얻었다. ‘은퇴 콘서트’가 아닌 ‘전통가요 헌정 공연-맥(脈)을 이음’을 고별 무대의 타이틀로 삼은 이미자에게 전통가요는 여전히 지키고 싶은 ‘보물’이다. 그 보물에 광과 윤을 낼 수 있다면 그는 분연히 나선다.

66년을 이어온 이미자의 노래는 항상 ‘정박자’였다. 그 흔한 꺾기 창법을 쓴 적이 없다. 정박자를 지키면서도 한(恨)과 정(情)을 다 표현했다. 임진모 음악평론가는 “한국의 트로트는 이미자 전과 후로 나뉜다. 꺾거나 휘지 않는 자연 창법으로 부르는 전통가요를 확립했다”고 평했다. 이미자가 말하는 ‘전통가요’와 대중이 널리 쓰는 ‘트로트’의 차이는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이미자의 인생도 정박자였다. 큰 구설 없이 66년을 쉼 없이 걸어왔다. 그 걸음을 멈춘 이후 그의 삶이 궁금했다.

약속한 시간인 오후 2시가 되기 1분 전 정확하게 카페에 도착한 이미자는 ‘핫초코’를 주문했다. 의외였다. 커피도 마다하고 따뜻한 물 한잔이나 차 한잔을 택할 것 같다는 건 편견이었다. “핫초코를 좋아하시냐?”는 질문에 그는 “가끔 마셔요”라며 살짝 웃었다. 66년간 목 관리 때문에 마음껏 좋아하는 음식도 먹지 못했다는 그에게 핫초코는 이제 편안히 누릴 수 있는 작은 호사였다.

―고별 공연을 마친 후 어떻게 지냈나.

“무지하게 아팠어요. 그래서 아무것도 못 하고 계속 쉬었어요. 공연 전에도 통 힘이 없었는데,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나니까 한동안 꼼짝도 못 했어요. 앉았다 일어나면 어지럽고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죠. 그 상태가 지금까지 쭉 이어지고 있어요.”

―‘동백아가씨’는 여전히 압권이었다. 스스로 만족스러운 공연이었나.

“정말 몸이 안 좋았거든요. 그래서 너무 이상했죠. 무난하게 노래를 불렀으니까요. 감기 때문에 목이 안 좋아서 연습을 전혀 못 했어요. 엄청나게 걱정했는데 기적이 일어난 거 같아요. 그래도 ‘흉내는 냈다’는 마음이 든 공연이었죠. 아마도 이게 정신력인가 봐요.”

―고별 공연을 마친 소감은.

“3가지로 표현할 수 있어요. 서운하다, 아쉽다, 또 이렇게 마무리 공연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팬들에게 감사하다 생각하며 행복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공연 무대에 설 때마다 노래 부를 자신이 없거든요. 그래서 100점짜리 공연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항상 ‘90점만 하자’는 생각으로 무대에 서죠. 이번 공연은 전날까지 목소리가 안 나오고 걱정 때문에 잠도 한숨 못 잤는데, 막상 무대에 오르니 ‘언제 아팠더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목소리가 나왔어요. 그야말로 ‘기적이구나’라는 생각밖에 안 들더군요.”

―‘트로트’가 아닌 ‘전통가요’임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통가요는 서민적인 노래예요. 그들의 희로애락이 묻어 있죠. 그 절절한 마음, 한스러운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게 전통가요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뽕끼’가 있는 노래라며 트로트라는 표현을 쓰더군요. 왜 갑자기 그런 표현이 생겼는지 이해가 안 가요. 저는 그 말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 표현 안에 이미 선입견이 깔려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제가 늘 듣고 싶고, 지키고 싶던 수식어는 ‘전통가요의 여왕’이었어요.”

(위 사진부터)1959년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한 이미자는 파병 위문 공연, 평양 공연 등 의미있는 무대를 꾸몄다.
(위 사진부터)1959년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한 이미자는 파병 위문 공연, 평양 공연 등 의미있는 무대를 꾸몄다.

―이미자의 노래에는 ‘꺾기’가 없다. 왜 이미자가 부르는 전통가요는 다른가.

“사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게 꺾기예요. 마치 꺾기가 노래를 강조하는 대표적 기술인 것처럼 생각하면 안 돼요. 전 꺾을 줄도 모르고, 굴릴 줄도 모르죠. 후배들에게도 ‘정박자로 불러야 한다’고 강조해요. 4박자 노래면 한 박자, 한 박자씩 정직하게 부르면서 그 맛을 살려야 하는데, 한 박자 반과 반 박자로 나눠서 부르는 기교부터 부리려 하면 안 됩니다. 충분히 노래 잘하는 후배들이 꺾기부터 시도하는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까워요.”

―정박자로 부르면서 노래의 맛을 살린다는 건 쉽지 않다. 그걸 해내는 이미자의 목소리를 연구하기 위해 일본의 한 연구소가 성대를 사들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사실인가.

“나도 그 소문을 들어봤어요. 낭설입니다. 왜 그런 기가 막힌 소문이 났는지 모르겠어요. 화가 나는 소문이었지만 그런 감정을 잘 표출하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가만히 있다 보니까 더 사실처럼 소문이 돈 것 같아요.”

―그럼 이미자의 창법은 어디서 시작된 것인가. ‘이미자의 스승’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

“신인일 때 여러 작곡가 선생님들이 ‘이렇게 불러라’라고 조언해주셨어요. 특히 저에게 많은 영향을 주신 분은 돌아가신 박춘석(1930∼2010) 선생님이죠. 박 선생님에게 지도를 많이 받았어요. 원래는 패티김, 안다성의 발라드곡을 많이 쓰셨는데 전통가요를 작곡하게 된 동기가 저를 만난 후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특히 제30주년 데뷔곡으로 만들어 주신 ‘노래는 나의 인생’은 제 인생 전체를 담은 곡이에요. ‘동백아가씨’를 쓴 백영호(1920∼2003) 선생님도 빼놓을 수 없죠. 박 선생님은 피아노를, 백 선생님은 기타를 다루며 주로 작곡을 했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 긴 세월 노래하면서 이미자가 작사·작곡한 노래는 왜 없나. 제안이 많지 않았나.

“작사는 제가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해도 안 되더라고요. 특히 데뷔 40주년 때 기념곡을 써보려고 무지무지 애를 썼는데 결국 못 썼어요. ‘내가 너무 소질이 없구나’라고 혼자 느꼈어요. (너무 겸손한 표현 아닌가?) 아니에요. 노랫말을 쓴다는 것, 창작은 보통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사람은 항상 자기의 주제를 알아야 해요. ‘모든 것이 다 된다’는 생각은 위험해요.”

―66년 가수 인생을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

“기억에 남는 순간이 많아요. 그런데 제일 기억에 남는 건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아빠’가 금지곡으로 지정됐을 때죠. 하루아침에 제가 부를 노래가 사라진 거예요. 아마도 ‘이미자의 노래가 금지됐다’는 그때부터 ‘이미자의 노래는, 전통가요는 수준 낮은 노래다’라는 편견이 생긴 것 같아요. 그게 가장 가슴 아팠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불렀어요. 편견까지 뛰어넘어야 했기 때문에 객석을 울릴 수 있는, 가슴에 와 닿는 가사와 멜로디를 전달하기 위해 항상 감정을 잘 넣으려고 노력했죠. 다른 가수들도 그런 마음으로 ‘꺾어서라도 반응이 오게 하자’라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몰라요.”

엄혹했던 시절, 이미자의 노래는 위로이자 기쁨이었다. ‘동백아가씨’는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35주 연속 1위를 기록했다. 이 노래의 가사처럼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이 노래를 들으며 버티는 이들이 적잖았다. 특히 타국의 전장에 놓인 파병 장병과 그 가족들은 서로 다른 하늘 아래에서 이 노래에 심취하며 서로를 그렸다. 그런 그들을 위해 이미자는 지난 1965년, 베트남전 발발 후 첫 한국군 위문공연단에 참여했다. 그리고 2002년에는 평양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평양 동백아가씨’라 명명된 이 공연은 국내 가수 최초로 남북 동시 생중계됐고, 남북 실향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잇는 가교가 됐다.

가수 이미자는 4월 열린 고별공연에서 여전히 낭랑한 목소리로 ‘동백아가씨’를 불렀다. 당초 후배들과 함께 부르려 했으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원하는 관객들이 실망할 것”이라는 남편의 조언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쇼당이엔티 제공
가수 이미자는 4월 열린 고별공연에서 여전히 낭랑한 목소리로 ‘동백아가씨’를 불렀다. 당초 후배들과 함께 부르려 했으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원하는 관객들이 실망할 것”이라는 남편의 조언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쇼당이엔티 제공

“미련없이 하고 싶은 것 다 해… 70주년때 돌아오면 거짓말쟁이”

베트남 전장 4년 연속 다녀와

위문공연 군인 눈 잊을수없어

2002년 평양서 단독 콘서트

北 노래 내 스타일로 부르니

관객들 ‘아~’ 인정하는 느낌

이혼·재혼 업보… 딸에 미안

위로 하고 싶어 동반 디너쇼

무대서 내려오니 잠도 잘 자

이젠 인간 이미자 삶 즐길것

―처음에는 평양에 가지 않으려 했다고.

“중국을 거쳐 평양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는데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어요. 그래서 ‘난 그렇게 가지 않는다’고 했죠. ‘내가 평양에서 공연을 하는데 왜 중국을 거쳐 가느냐. 평양 공연을 안 하면 안 했지,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다’고 한 거예요. 결국 대한항공 전세기를 띄워서 저와 40인조 관현악단이 북한 순안공항까지 직항으로 갔어요. 북한에 도착한 후에는 대접을 잘 받았어요. 모두 버스로 이동하는데 저를 위한 벤츠가 따로 나오더군요.”

―북한에서 못 부르는 노래가 있나.

“선곡에 제한을 좀 두더군요. 북한 사람들이 들으면 좋지 않은 내용이 담긴 노래가 있는 것 같았어요. 대신 평양 시민들을 위해 일부러 가사에 북한 지명이 들어간 노래들을 불렀어요. ‘몽금포 타령’과 ‘선죽교’ ‘성불사의 밤’ 등이었죠. 성불사는 평양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데 ‘가보고 싶다’고 했더니 데려다줬어요. 북한 측에서 ‘백두산도 보겠느냐’고 물었는데, 비행기까지 타고 가야 한다고 해서 가지는 않았습니다.”

―기억에 남는 노래는 무엇인가.

“북한 노래 ‘다시 만납시다’가 마지막 곡이었어요. ‘백두에서 한라로 우린 하나의 겨레 안녕히 다시 만나요’라는 가사인데 제 스타일로 바꾸어 부르니 깜짝 놀라는 게 보이더라고요. 제가 그 노래를 마친 후에는 ‘아∼ 이런 사람이구나’라고 인정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북한의 합창단, 관객들과 이 노래를 합창했을 때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베트남 위문공연단에 참여하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말도 못할 상황이었어요. 그 당시에는 베트남에 가면 헬리콥터를 타고 있어도 떨어지고, 총 맞아 죽는다고 할 때였죠. 그러니 연예인들이 다 피했어요. 죽을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저를 딱 지목하셨어요. ‘이미자는 가야 한다’고. 그래서 ‘후라이 보이’ 곽규석, 구봉서 두 분이 사회를 보고 무용단과 악단으로 구성된 위문공연단이 꾸려진 거죠. 직항도 없었어요. 여의도에서 비행기 타고 홍콩으로 가서 1박하고, 다시 필리핀으로 들어간 후 캠핑용 트레일러에서 또 1박을 한 후에 3일 만에 군용기를 타고 사이공에 도착한 거예요.”

―현장에서 만난 한국 군인들은 어땠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하필 그곳에서는 장교 식당에서 아침마다 ‘동백아가씨’를 틀어놓았다고 해요. 제가 무대 위에서 ‘동백아가씨’를 부르는데 젊은 혈기의 군인들의 큰 눈망울이 이글이글하고, 눈만 마주치면 눈물이 툭툭툭툭 떨어지는 거예요.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인 거죠. 처음에는 ‘잘못 왔나 보다’ 싶었는데 그 눈을 보며 ‘실컷 울고 가슴이라도 후련하게 만들어줘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한국으로 돌아간 후에는 청와대에 가서 ‘다녀왔습니다’라고 귀국 인사를 했는데, 그 군인들의 눈을 잊을 수 없어서 다시 위문공연단에 참가한 후 청와대에 가서 ‘또 다녀왔습니다’라고 보고하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베트남에서도 고마워하더군요. 4년 연속 다녀왔는데, 당시 베트남 대통령이 한국에 오셨을 때 제게 훈장을 주셨어요. 그 훈장이 아직도 우리 집에 있어요.”

이미자는 실제 열아홉 살에 ‘열아홉 순정’(1959)으로 데뷔했다. 그리고 노래에 그의 순정을 다 바쳤다. 꼬박 66년이다. 그 사이 그가 발표한 노래만 2600여 곡이 넘는다. 지난 1990년에는 당시 기준 2069곡을 발표해 기네스북에 올랐다. 가끔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내가 ∼이 노래를 불렀었나”라고 헷갈릴 때가 있다고 한다.

공연 활동에도 열중했다. 2000년대 이전에는 주 4회, 이후에는 주 2회씩 무대에 섰다. 주말에 모든 힘을 짜내서 공연을 치렀고, 주중에는 다음 주말 공연을 위해 다시 기력을 채우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신경을 많이 못 써줬다”며 가족에게는 늘 미안해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덧 80대 중반에 접어들었다. 평소에도 집에 있길 즐긴다는 이미자는 “만날 친구도 없다”고 했다.

그런 이미자가 노래를 내려놓았다. 이제 다시는 ‘이미자’ 이름 석 자를 건 상업 공연은 없다고 단언했다. 큰 짐을 내려놓으니 잠도 잘 잔다고 한다. 이후 이미자의 삶은 어떻게 흘러갈까.

이미자는 지난 2023년 대중음악인 최초로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이미자는 지난 2023년 대중음악인 최초로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고별 무대에 선 이미자는 건재하더라. 그런데 왜 여기서 멈추려 하나.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말도 있더라.

“건강해요. 잘 먹고 잘 자요. 아침 7시에 일어나 아침 준비하고 8시 반에 먹어요. 젊을 때부터 시집살이하면서 남편(전 KBS PD)의 출근과 퇴근을 챙겨야 하니 정확한 식사 시간이 있죠. 누군가는 ‘시집살이가 심했다’고 이야기하는데, 저는 오히려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되면서 건강이 좋아졌어요. 제 나이 84세잖아요. ‘이제 무대에 그만 서지’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관람료 받아놓고 그에 걸맞은 공연을 못 보여드리면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가 다 망가지잖아요. 저는 내려올 때가 된 거예요.”

―이미자의 삶은 그의 창법처럼 ‘정박자’를 걸어온 것 같다. 혹시 이미지의 삶에도 ‘일탈’이 있었나.(그러자 그는 먼저 첫 결혼 생활에 낳은 딸인 가수 정재은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꺼냈다.)

“있었잖아요, 과거. 젊을 때, 아무것도 모를 때라지만 제가 겪은 과거니까요. 오랜 기간 딸을 만나지 않은 건 제 철칙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주위에서 지독하게 욕을 했지만, ‘내가 잘못한 거니까 듣는 말이다’라고 받아들였어요. 각자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면 두 사람 모두 풍파를 면할 길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각자 그렇게 살다가 우리가 다시 만나 교류를 시작한 지는 꽤 돼요. 재은이가 일본에서 결혼하고 가정을 꾸린 계기로 다시 만났어요. 굳이 밖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이죠.”

―지난해 12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정재은 이미자 디너쇼’가 큰 화제를 모았다. 현재 모녀의 관계는 어떤가.

“특별한 건 없어요. 단지 ‘엄마와 같이 무대에 서고 싶다’는 딸의 소원을 풀어주고 싶었어요. 그렇게 해서 딸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된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저는 그걸(이혼과 재가) 업보로 알고 살았어요. 제가 잘못했으니 해명할 이유도 없고요. 지금도 댓글로 많이 욕을 먹지만 괜찮아요. 제가 견딜 몫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걔에게는 너무 미안하죠. 그런 와중에 일본에서 25주년 공연을 한다고 해서 같이 무대에 오르게 된 거예요.”

―이제 ‘가수 이미자’가 아닌 ‘인간 이미자’로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나 하고 싶은 거 아무것도 없어요. 하고 싶은 거 이미 다 했으니까…. 여행도 기운이 있어야 다니죠(웃음). 65년 내내 공연을 했는데 제 노래의 높낮이 폭이 커서 굉장히 힘들어요. 주말 공연을 마치면 내내 집에서 쉬어요. 조용히 있는 것을 좋아하니까 그냥 집에만 있는 게 습관이 됐죠. 예전에는 책도 보고 뜨개질도 했는데 이제는 눈이 피곤해요. 친구도 없고, 사람들 만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해요. 당장은 올여름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싶어요.”

―당대를 함께 주름잡은 패티김, 조용필, 나훈아, 남진 등 동료들도 있지 않나. 서로 소통이 없나.

“전혀 없어요. 남자들끼리는 만날지 모르겠는데 저는 거의 없어요.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서로 만나면 안 어려울 수 있을까요? 대하기 어려워서 아마 저한테는 연락 안 할 것 같아요. 아, 이번에 고별 공연할 때 (조)용필이가 꽃바구니를 보내 왔대요. 따로 연락을 한 건 아니고요. 서로 전화통화하고 그럴 처지들은 아니죠. 그래도 패티김과는 종종 만났어요. 2년 전까지도 한국에 오면 저한테 연락을 주셔서 식사도 하고 그랬죠.”

―아주 어려운 질문을 드리겠다. 이미자의 66년 가수 인생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어렵지 않아요. 그냥 ‘동백아가씨’예요. 그 이름으로 이미자가 탄생했고, 동백아가씨로 끝났다고 생각해요. ‘엘레지의 여왕’은 20대 때 한 영화사에서 붙인 이름인데 당시 제가 30대만 됐어도 허락하지 않았을 수식어예요. 저는 동백아가씨가 다예요. 동백아가씨 때문에 사연도 많고, 슬픔도 기쁨도 많았죠. 전 그때도 지금도 그냥 동백아가씨고, 그러고 싶어요.”

―이러다 몇 년 후 70주년 콘서트로 돌아오는 것 아닌가.

“그러면 거짓말쟁이지, 완전히.”

―그렇게 해도 다들 반길 거다.

“아니에요. 아마도 내 몸이 지탱하지 못할 거예요. 이제는 그냥 ‘동백아가씨’로 기억되는 ‘인간 이미자’의 삶을 즐길 거예요.”

안진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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