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워인터뷰 - 전통가요 맥 이은 이미자
1941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미자는 어릴 적부터 가창력이 남달랐다. 불과 16세였던 1957년, KBS ‘노래의 꽃다발’에 출연해 1등을 차지했다. 원조 ‘오디션 스타’였던 셈이다. 그러다 작곡가 나화랑의 눈에 띄었고 그가 쓴 ‘열아홉 순정’(1959)으로 정식 데뷔했다.
1950∼1960년대는 미8군을 중심으로 대중음악이 번성하던 시기였다. 패티김, 현미 등이 부른 스탠더드 팝이 인기를 끌던 음악 시장에서 한국적 한과 정서를 강조한 이미자의 노래는 단박에 대중의 귀를 사로잡았다. 더 이상 일본의 엔카를 듣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열었다.
이미자는 1964년 ‘동백아가씨’를 발표하면서 당대 최고의 스타로 도약했고, 이듬해에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을 위로하기 위한 첫 위문공연단에 합류했다. 당시 이미자는 전장의 중심에서 전통가요의 힘을 봤다. 그는 “자식들 먹이고 배우게 하기 위해 베트남으로, 파독 간호사·광부로 나간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이 전통가요를 들으며 위로를 받았다”면서 “전통가요는 시대의 흐름을 대변한다. 시대가 바뀌어도 절대 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미자는 지난 1989년 대중가수 최초 세종문화회관 단독 공연도 열었다. 금지곡으로 지정됐던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등이 해금된 후다. 당시 이미자가 세종문화회관을 대관한 것이 신문 문화면이 아닌 사회면에 실렸다. “이미자를 세종문화회관에 세우면 ‘고무신짝’들이 많이 들어와 질서가 없어지고 문화를 해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미자는 세종문화회관에 당당히 입성했고, 당시 김대중·김영삼·김종필 등 4당 총재가 모두 부부동반으로 그의 공연을 보러왔다. 이후 이미자는 데뷔 35주년·40주년·45주년·50주년·55주년·60주년 공연에 이어 고별 무대도 이 자리에서 펼쳤다. 이렇듯 모진 시선 속에서도 전통가요를 지켜온 그는 ‘뽕짝’이라 불리고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질타받던 때를 떠올리며 “나라 잃은 설움부터 우리네 삶의 슬픔과 기쁨이 모두 다 담긴 노래였다. 그 가사의 내용을 곱씹으며 함께 견디고 살아왔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이미자에게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없다. 그래서 고별 공연에서 주현미·조항조·김용빈·정서주 등 후배 가수들을 “전통가요의 맥을 이어줄 후배들”로 소개했다. 공연 당시 진행자가 ‘동백아가씨’의 가사를 인용해 “이제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누가 위로해주나?”라고 아쉬움을 드러내자 이미자는 웃으며 말했다. “후배들이 잘 이어갈 겁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달라지는 건 당연합니다.”
안진용 기자주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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