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미 논설위원

 

K-학원물보다 위태로운 현실

악성민원에 학교 떠나는 교사

보충 학습에 ‘낙인찍냐’ 항의

 

공교육도 자녀도 모두 망친다

민원 대응 공식적 채널 현실화

묻지마 소송 막을 대응도 필요

최근 인기몰이를 한 드라마 ‘약한 영웅’은 싸움이라곤 해본 적 없는 주인공이 뛰어난 두뇌와 전략으로 무시무시한 학교 폭력의 세계를 뚫고 나가는 이야기다. 넷플릭스 비영어권 1위에도 올랐던 드라마는 ‘여고괴담’(1998)에서 시작해 ‘스카이캐슬’(2018), ‘지금 우리 학교는’(2022)으로 이어지는 K-학원 장르물 계보의 적자다.

이 세계에서 학생은 치열한 경쟁, 왕따와 폭력의 피해자다. 하지만 부모는 성적만 말하고 교사는 무력하다. 권력자 학부모는 학교로 밀고 들어오고 학교는 그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사정이 이러니 학생은 스스로 지키며 각자도생해야 한다. 클리셰 덩어리에 자극적인 픽션이지만 K-학원물은 우리 현실을 반영한다. 최소한 한국 사회가 학교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바로 두려움과 불안이다. 학교만 보내서 제대로 공부하겠냐는 불안, 학교에 아이를 맡겨도 되겠냐는 두려움이다. 한국이 경제는 세계 10위권에 오르고 문화는 글로벌 톱인데 변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을 교육하는 학교만 그대로다. 성공 경쟁 등 한국 사회의 해묵은 문제들의 총집합이다. 위태로운 공교육은 더 위태로워지고 있다. 학교에 대한 믿음이 깨져 모두 사교육으로 몰려간 지 오래다. 지난해 초중고 사교육 시장 규모는 29조2000억 원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이 같은 학교의 총체적 문제가 매우 선정적으로 터져 나온 것이 ‘악성 민원’이다. 지난 14일 전국 교원 1만여 명이 집회를 열었다.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 관련 집회 이후 1년 4개월 만이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교사노동조합연맹,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 지향점이 다른 세 단체가 함께 주최했다. 그만큼 상황이 급하다는 뜻이다. 이날 교사들이 가장 심각하게 호소한 것이 다름 아닌 학부모의 진상 ‘악성 민원’이었다.

요즘 교육 현장에선 기초학력이 떨어지는 아이에게 보충학습을 시켰다간 ‘왜 아이를 낙인 찍는냐’는 식의 항의가 넘쳐 난다. 체육 시간에 넘어져 무릎만 까져도 민원이다. 항의는 항의로 끝나지 않는다. 교사에게 항의 문자가 수백, 수천 통 쏟아지고 아동학대 신고나 행정소송으로 이어진다. 2023년 9월부터 올해 2월까지 수사 완료된 아동학대 신고 건수 438건 중 95% 이상이 불기소나 불입건으로 마무리됐다. 일단 신고하고 보는 식이다. 학부모 카페에는 교사 상대로 아동학대를 신고하는 방법이 공유되고 교사들 사이에서는 ‘싫은 소리 했을 때 간식을 주며 사과하라’는 민원 피하기 팁이 공유되는 실정이다. 민원은 교사들이 교직을 그만두는 이유 중 하나다. 결국엔 자신들의 자녀를 망친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나.

학부모가 된 80년대생의 특징이 요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대부분 한 자녀로 ‘내 아이는 소중하다’는 인식에 쉽게 비교하는 SNS 문화까지 겹쳐 자녀의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 문제로 돌리기엔 공교육 구멍이 크다. 학부모는 학교를 믿지 못하고 학교는 학부모에게 시달리고 있다. 한 번에 해결될 수 없는 근본적 문제지만 사안별 대응이 시급하다.

일단 학부모 민원에 대한 공식 대응 채널 가동이 절실하다. 미국에선 학부모가 학교나 교사에게 문제를 제기할 때 공식 채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교사의 개인 연락처 사용은 금지돼 있다. 반면 우리는 교사 70% 이상이 개인 연락처를 공개해 민원 통로가 되고 있다. 업무 관련 소송은 당국이 일단 해주고, 교사 잘못으로 판정되면 구상권을 청구하는 시스템도 고려해볼 만하다. 교육 선진국 핀란드에서는 교사에 대한 인격적 모독은 벌금형 등 실질적 처벌이 이뤄지고 있다. 신고 남발에 대한 대처도 필요하다. 정당한 교육활동은 면책 사유가 되는 ‘아동학대처벌법 개정안’이 8일 국회에서 통과됐다. 교권보호 5법이 제정되고도 현장 인력과 예산 부족으로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는 실정을 생각하면 실행이 관건이다.

공교육 살리기는 시급한 과제이다. 윤석열 정부에서 사교육을 없애기 위한 디지털 AI 교과서, 자기 주도형 학습을 위해 고교 학점제를 실시했으나 오히려 혼선만 더 키우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도 ‘국가 책임 강화’, ‘신뢰받는 공교육’을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분명한 것은 교육 주체인 교사가 위협받으면 공교육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최현미 논설위원
최현미 논설위원
최현미 논설위원
최현미

최현미 논설위원

논설위원실 / 논설위원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