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레오로스’
임문영 지음, 학고재, 288쪽
한국사를 조금 깊이 들여다 보노라면 몇 가지 놀라운 사실과 맞닥뜨리게 된다.
· 조선의 개항(1876년 강화도 조약)은 일본(1854년 미·일 화친 조약)에 불과 22년 늦었다.
· 망국의 결정적 원인으로 치부돼 온 조선 말 쇄국정책은 불과 10년(1866~1876년) 동안 지속됐다.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한 세대에도 못 미치는 격차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그 차이가 낳은 결과는 무시무시했다. 일본은 산업화에 성공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열강 반열에 올랐다. 반면 우리는 한 세기 넘게 망국과 분단, 전쟁, 빈곤, 독재의 늪에서 허우적대야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새 책 ‘파레오로스’(임문영 지음·학고재)의 저자는 “역사에는 결정적 분기점이 되는 변화의 순간이 있다”고 이 질문에 답한다. 이어 “그런 결정적 시기가 다시 오고 있다”며 묵직한 화두를 꺼낸다. “우리가 맞는 지금은 제2개화기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우리가 대륙과 대양으로 뻗어나갈 기회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또 다른 국제질서에 휘말려 붕괴될 위기이기도 하다.”
인류 역사에서 이런 ‘결정적 순간’은 처음이 아니지만, 그리 많았던 것도 아니다. 직립 보행과 불 사용, 농업 혁명, 근대 과학기술 혁명과 민주주의 혁명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를 통해 인류는 차원이 다른 진보를 경험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또 하나의 ‘결정적 순간’으로 만든 ‘결정적 변화’는 두 축으로 이뤄졌다. 첫째는 디지털 전환이다. 인공지능(AI) 혁명의 모습을 띤 이 전환으로 지식은 인간의 지식에서 기계의 지식으로 넘어가고 있다. 이는 인류가 보다 뛰어난 지능을 가진 기계와 함께 살아가는 것을 예고한다.
다른 한 축은 에너지 전환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 탄소 에너지에서 재생 에너지로 바뀌고 있다. 무한 에너지 시대의 도래는 경제학의 기본 틀을 흔드는 것을 넘어 민주주의와 국민국가의 개념, 가치, 제도, 보상 체계 등을 송두리째 재구성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미 현실로 다가온 이 거대한 변화의 시대는 “우리가 모른다고 알고 있는, 그것을 넘어서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unkown unkown)이 어느 정도일지는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격변의 시기다. 이런 때일수록 인류가 지나 온 ‘결정적 순간’의 경험이 중요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지식이 권력, 민중과 어떻게 결합하고 대립해 역사를 바른 방향으로, 승리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왔는지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세 마리 말이 끄는 로마 전차에 비유해 지식과 권력, 민중이 이뤄낸 다이내믹한 3중주를 설명한다. 세 마리 말은 서로 다른 기질이 있더라도 한 방향으로 달리도록 강제된다. 역사에서 세 마리 말은 진리와 권력, 행복이라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욕망을 품고 달리는 지식인과 권력자, 민중이다. “역사의 변곡점마다 지식은 권력 또는 민중과 결맞음으로 돌파구를 만들었고, 새로운 역사를 썼다. 따라서 역사에서 ‘혁명적 변화 = 지식 X (권력 + 민중)’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의 진리’, ‘권력자의 권력의지’, ‘민중의 행복’은 솥단지의 세 발과도 같다. 어느 하나라도 놓치면 솥은 기울어진다. 지식이 권력에 종속되면 진리를 잃고, 권력을 거부하면 변화를 이끌 수 없다. 민중이 권력에 종속되면 노예의 삶을 살게 되고, 권력을 부정하면 혼돈의 무질서를 각오해야 한다.
이처럼 지식과 권력, 민중은 대등하고 독립적이어야 하지만, 로마 삼두전차의 세 마리 말 중 하나는 멍에를 지지 않았다. ‘파레오로스’(영어로는 outrunner)라 불린 이 말은 다른 두 말과 함께 달리면서 그들보다 더 멀리 봤고, 때론 더 빨리 때론 더 천천히 달리면서 전체의 속도와 방향을 조절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 ‘결정적 순간’에 방향키는 누가 쥐어야 하는가. 저자가 내놓은 답은 ‘지식’, 더 구체적으로는 ‘파레오로스의 지혜를 가진 지식인’이다. “파레오로스의 지혜가 권력의 의지, 민중의 희망과 결합할 때 우리는 이 새로운 문명 대전환의 변화를 주도할 수 있다.”
‘파레오로스의 지혜를 가진 지식인’은 과거 지식인 상과는 거리가 있다. 특정 직업에 고정된 게 아니라 민중 전체에서 발전할 수 있는 존재다. 이들은 자연과학적 합리성을 위해 통섭할 줄 알고 사회과학적 설득을 위해 공감하고 대화하는, 사회적 시야를 가진 전문가나 디지털 문해력을 갖춘 시민으로 확장되고 있다.
저자는 하이텔과 나우누리 운영자로 시작해 디지털 미디어를 구축하고 미래성장 정책을 만드는 데 매진해 온 ‘디지털 지식인’(digerati)이자 이재명 정부 출범에 헌신한 참여형 지식인이다.
누구나 지식인이 될 수 있는 시대, 그러나 해답 뿐 아니라 그 출발점이 되는 문제까지 송두리째 바뀌는 미지의 시대다. 이렇게 위험과 기회가 중첩된 위기의 시대를 헤쳐나가야 하는 우리 공동체 시민들에게 안내서가 될 만한 책이다.
오남석 기자주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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