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이 책

 

나는 여기가 좋아

아마노 칸나 글·그림│ 김정화 옮김│ 제제의 숲

부동산을 다녔다. 여기도 저기도 마음에 차지 않았다. 운치가 없었다. 밝고 조용하면 좋겠다. 햇빛이 집 안쪽까지 들면 좋겠다. 긴 벽이 있어 책장 여러 개를 두기 충분하면 좋겠다. 그러고 있으니 엄마가 말했다. 변기, 세면대, 싱크대 물 잘 내려가는지 봐. 곰팡이나 누수 흔적은 없는지, 부엌 후드는 깨끗한지 봐. 관리비랑 공과금 얼마나 나오는지 물어보고. 사기 많다니까 조심하고.

서점에 갔다. 몸과 맘이 허했다. 새 그림책을 구경하다 보면 좀 기운이 날까. 그러다 운명처럼 이 그림책을 만났다. 아마노 칸나의 ‘나는 여기가 좋아’. 제목이 마음에 쏙 든다. 흰 바탕에 돌 하나가 앉아 있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본다. 고집스러운 성미가 느껴진다. 이 조그만 돌멩이 데굴이는 커다란 나무 밑에 산다. 조용하고 아늑하다. 친구 동글이가 강이나 땅속으로 놀러 가자고 해도 데굴이는 거절한다. 돌아앉아 중얼거린다. 강물에 깎이거나 땅속 천장이 무너져 내리면 어떡하느냐고 한다. 동글이는 그런 데굴이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주저하는 데굴이의 등을 툭 밀어준다. “그때는 내가 구해 줄게. 자, 가자!”

낯설지만 아름다운 세상이 있다. 여기에서 저기로 걸음을 옮겨야 만날 수 있다. 도전은 두렵지만 누군가의 말이 등짝을 밀어 나아가도록 한다.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기꺼이 해볼 만하다고!” 친구들의 말에 용기를 낸 데굴이는 지금껏 보지 못한 풍경을 만난다. 머리에 작은 실금이 생겨 버렸지만 왠지 후련하다. 큰 눈과 입이 감정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헐렁한 선, 페이지를 다 채우지 않는 색이 이야기에 어울린다. ‘괜찮아. 뭐 어때’ 하는 마음이 전해진다. 덩달아 시원해진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부동산에 간다. 계약서를 쓸 차례다. 들어갈 방은 작지만 두 면에 창이 나 있다. 서향이라 저녁해를 기대하게 된다. 공간이 허락하는 만큼 긴 테이블을 들일 것이다. 아이들과 쓰고 놀 것이다. 거기서 데굴이처럼 새로운 나를 만나길 기대한다. 그리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여기가 정말 좋아.” 해 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이다. 36쪽, 1만4800원.

남지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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