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서 항상 침묵 칭송해와

당장의 안전·안정은 보장하지만

결국 자기의심·고통의 악화 불러

 

나를 지키기 위해 위험 감수해야

일상서 욕구 표현하는 연습 필요

 

■ 침묵 깨기

일레인 린 헤링 지음│황가한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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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침묵은 미덕이다. 수다스럽다는 말은 대체로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니고, 말수가 적은 아이는 ‘어른스럽다’는 칭찬을, 과묵한 어른은 ‘무게감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침묵이 칭송받는 동안 말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무엇이었을까. 부당한 지시와 훈계, 무례한 비판과 차별적 무시가 아니었는가. 우리는 침묵을 배워왔고, 때로는 그 덕에 사회적 생존을 도모해왔지만, 과연 그 침묵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돌아볼 때가 왔다. 하버드대 법학전문대학원에서 협상과 갈등 해결을 강의한 협상 전문가인 저자는 이 책에서 말한다. “당신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

우리는 자라면서 다양한 경로를 통해 침묵을 학습한다. 종교와 전통, 사회적 기대는 입 다물기를 미덕으로 가르친다. 힌두교의 ‘마우나’ 수행, 불교의 묵언 수행, 성경과 쿠란 속 말의 위험에 대한 경고는 모두 침묵의 가치를 강조한다. 디즈니의 고전 애니메이션 ‘밤비’에서조차 이런 대사가 있다. “좋은 말을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마.” 이렇게 침묵을 강조하며 ‘좋은 말’뿐 아니라 모든 말을 없앤 결과, 사회는 개인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왔다.

침묵은 단순히 말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저자는 침묵이 실은 전략적인 생존 방식이라고 분석한다. 갈등을 피하고, 피로를 줄이고, 해명에 드는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우리는 종종 침묵을 선택한다. 아이는 울고 말하며 자신을 표현하는 존재이지만, 자라면서 그 표현은 ‘예의’와 ‘인내’라는 이름으로 억눌린다. 노년에는 ‘말을 아끼는 지혜’를 강요받고, 노인의 언어는 무시되기 쉽다.

이렇게 우리는 생애 전반에 걸쳐 말 대신 침묵을 내면화하며 살아간다. 침묵은 당장의 안전과 안정을 보장하는 듯 보인다. 문제는, 그 대가로 우리가 무엇을 잃는가이다. 계속된 침묵은 자기 의심, 인격 침해, 사고력 둔화, 고통의 악화를 초래하며, 결국 한 사람의 자아를 희미하게 만든다. 침묵은 우리를 보호하는 듯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지워간다.

1920년대 말부터 1945년 사이에 미국에서 태어난 ‘침묵의 세대’는 대표적인 예시다.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의 광풍 속에서 이들은 말을 아끼는 삶을 선택했다. 묻는 말에만 답하고,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지 않으며 자신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그렇게 형성된 침묵의 분위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캔슬 컬처’가 확산된 사회에서 우리는 정치, 종교, 사회적 신념에 대한 언급을 꺼린다. 대신 무해한 화제만을 입에 담는다. 침묵은 질문을 멈추게 하고, 생각을 억누르며, 결국 자아를 흐리게 만든다. 아이들은 하루에 평균 125개의 질문을 하지만, 성인은 6개에 그친다. 아동기와 성인기 사이의 어딘가에서 질문은 멈췄고 호기심은 죽었다.

이 책이 전하는 중요한 메시지는 “말하라”가 아니라, “왜 말하지 않는지를 성찰하라”는 것이다. 저자는 침묵을 깨기 위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법을 제안한다. 예컨대 택시 안에서 답답함을 느꼈다면,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어도 되겠냐고 말해보는 것처럼. 일상의 사소한 순간에서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는 연습이 침묵을 깨는 시작이 될 수 있다. 더불어 우리는 ‘아랫사람’의 침묵을 강요하는 무의식적 권력 작용에서 벗어나야 한다. 부하직원, 자녀, 고용인의 발언을 ‘무의식적으로 차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물론 말하는 것은 위험을 수반한다. 목소리를 내는 순간 우리는 갈등과 마주하게 되고, 때로는 관계나 밥벌이를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침묵에서 얻은 배움이 있듯, 침묵에서 벗어나야 알게 되는 깨달음이 있다. 저자의 말처럼 “나에게는 내가 배운 것들이 문제가 될 수 있는 이유를 알아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9세기 아랍 속담이 있다.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 물론 금은 귀한 자산이고 자본주의의 기반이다. 침묵은 나의 에너지를 절약해주고 돌봄의 시간을 준다는 점에서 필수적이다. 하지만 꼭 금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 마침 요즘 은값도 강세다. 무거운 금을 지키느라 입을 닫고 살기보다, 약간의 용기와 위트를 담은 은빛 말 한마디가 오히려 더 빛날 수 있다. 시대가 바뀌었다면, 이제는 ‘은’도 선택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388쪽, 2만2000원.

신재우 기자
신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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