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자리를 빌어 여러분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 이 문장에서 오류를 발견했다면 맞춤법이나 표준어에 관심이 많은 40대 이하일 것이다. 과거에는 진심을 담아 ‘심심한 사과’라고 했으니 여기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의 날카로운 눈은 ‘빌어’, 그리고 이것과 짝을 이루는 ‘자리를’에 머물러야 한다. 물론 정확하게 쓰고자 한다면 ‘자리를 빌려’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나이가 지긋한 이들에게는 ‘자리를 빌어’가 지극히 자연스럽고 ‘자리를 빌려’는 뭔가 잘못 쓴 느낌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에는 여기에도 ‘빌다’를 썼다가 1988년에 개정 표준어규정이 발표되었다. 이 규정에 따르면 ‘빌다’는 ‘소원, 용서, 명복, 공짜 밥’ 등이 목적어일 때 쓴다. 반면에 ‘빌리다’는 ‘돈, 일손, 형식, 자리’ 등이 목적어일 때 쓴다. 따라서 현재의 규정에 익숙한 젊은이들은 ‘자리를 빌려’를 쓴다.
그런데 지독하고 몹쓸 것을 가리키거나 일이 뜻대로 안 될 때 나오는 욕은 ‘빌어먹을’이어서 헷갈린다. 이 말은 ‘빌어먹다’에서 온 것인데 이때에는 ‘빌다’가 쓰였으니 문제다. 그러나 ‘빌어먹다’는 남에게 구걸해서 거저 얻어먹는다는 뜻이다. 거지들이 동냥해서 먹을 때 나중에 다시 갚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 아니니 ‘빌리다’가 아니다. 이때는 밥을 달라고 애원해서 받는 것이니 ‘빌다’가 쓰이는 것이다.
‘빌어먹을’이란 욕은 먹는 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잘 반영하는 말이다. 먹어야 사는데 제 손으로 벌어서 먹지 못하는 빌어먹는 삶은 제대로 된 삶이 아니라는 뜻이다. 결국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남에게 구걸해서 사는 사람이니 그냥 ‘거지’라고 하는 것보다 더 아픈 말일 수도 있다. ‘빌어먹을, 자리를 빌어는 왜 안 돼?’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스마트폰 속의 사전만 잠깐 빌려 봐도 이 말이 틀린 걸 금세 알 수 있다.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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