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헌법학

제77주년 제헌절이다. 해마다 맞는 제헌절이지만,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 공허하게 느껴진다. 1987년 6월항쟁의 산물인 지금의 제9차 개정헌법이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헌법은 공감적 가치의 실현을 통해 사회를 통합하는 가치규범이고 통치규범이다. 문민정부를 탄생시킨 현행 헌법도 자유민주주의 공감적 가치인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삼권분립의 원칙을 비롯한 여러 통치구조의 기본원리를 채택했다. 삼권분립은 통치규범의 핵심이다. 복수정당 제도에 따른 다수결 원리도 단순한 의사결정의 방식이 아니다. 다수와 소수의 타협과 절충 과정을 통해 다수의 독재를 방지하기 위한 자유민주주의의 실현 수단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헌정 질서는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 헌법 가치를 무시하는 여러 도전에 직면해 헌법 가치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입법부와 행정부를 장악하고 있는 이재명 대통령의 반(反)헌법적인 통치 행태이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을 앞세워 다수결 원리를 다수의 독재 수단으로 악용하면서 위헌적인 법률을 남발하는 등 삼권분립을 무시하는 통치 행태를 서슴지 않고 있다. 자신에게 유죄 선고를 한 대법원을 협박하면서 사법권까지 장악하기 위한 입법도 마다하지 않는다.

최고 규범인 헌법적 가치를 지키라고 만든 헌법재판소마저 대통령의 영향을 받게 된 현실은 헌정 질서의 위기를 더욱 실감하게 한다. 입법·사법부에 이어 헌법재판소까지 장악한 이 대통령은 헌법기관인 검찰총장을 수장으로 하는 검찰청마저 폐지해서 소추기관도 지배하려 한다. 그에 더해 자신의 형사사건 변호인 12명을 중요 공직에 임명하는 등 대통령의 공무원 임명권을 개인적인 보은의 수단으로 악용한다.

또, 헌법에서 강조한 통일 과제도 완전히 무시한다. 헌법은 조국의 분단 상황을 끝내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대통령과 정부에 통일정책을 수립해서 추진하라고 명한다. 그런데도 북한의 김정은이 통일을 금기시하는 대남정책을 천명했다고 해서 우리 정부도 그에 동조하는 언행들을 서슴지 않는다. 이처럼 헌법 가치보다는 이념을 앞세우는 세력이 국가 권력을 장악한 채 폭주한다.

제헌절이 그나마 의미를 가지려면 헌법 위기의 원인을 찾아 개선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선거제도의 개선이 가장 급선무이다. 여당 단독으로 제정한 지금의 국회의원 선거제도는 국회의 구성에 국민의 정치 성향을 전혀 비례적으로 반영하지 못한다. 각 정당의 득표율과 의석수가 정비례하지 않게 돼 있어 지금 같은 거대 여당이 탄생한 것이다. 지난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과 국민의힘 지역구 공천 후보자들이 얻은 표는 50.48% 대 45.08%로 차이가 5.40%포인트에 불과한데도 의석수는 161 대 90으로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독일처럼 완전한 비례대표제를 통해 국민의 정치적인 세력 분포가 그대로 국회의 의석수로 반영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부정선거의 진원지로 지적되는 사전투표 제도도 폐지해야 한다. 미증유의 헌정 위기 상황의 시발점은 바로 잘못된 선거제도이므로 모든 정치 세력이 선거제도의 개선을 국민에게 확실하게 공약하는 제헌절이 됐으면 한다.

허영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헌법학
허영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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