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희 정치부 차장
컴컴한 새벽 공기를 뚫고 우물에서 퍼 올렸을 정화수 한 그릇. 이제는 산산조각 난 그릇 위에 50여 년 쌓인 먼지와 잡초가 뒤엉켜 있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 한 북한군은 “우린 저 정화수 그릇을 절대로 건드리지 않지. 우리도 다 어머니는 있으니까”라고 말한다. 전쟁 나간 아들을 향한 하염없는 기다림, 그런 어머니에 대한 북한군의 애틋함이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사랑의 불시착’은 문재인 정부 때 ‘북한 신드롬’을 일으켰던 드라마다. 재벌 상속녀와 북한 장교의 로맨스 외에도 이웃들과 술 한잔으로 하루 회포를 풀고, 한국 드라마를 보며 울고 웃는 북한 소시민들의 애환을 담았다. 독재와 핵무기로 점철된 북한 이미지가 드라마를 계기로 획기적으로 달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도 최근 취임사에서 “남과 북이 김소월의 진달래꽃 100년 공동행사를 같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나”라고 했다. 얼어붙은 남북관계를 녹일 마중물로 한민족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을 남북이 함께 기리자는 제안이다.
꾸준하고 일관된 선의는 북한의 꽉 닫힌 문을 언젠가 열 수도 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자마자 점령군처럼 뒤흔드는 정책이어서야 북한은 물론 우리 국민에게 제대로 된 선의로 받아들여질 리 없다. 정 장관은 취임 전후 통일부 명칭 변경 추진, ‘북한 주민 접촉 신고 처리 지침’ 폐기 등 매일 새로운 뉴스를 쏟아내고 있다. 한미연합훈련을 조정하자거나, 경주 APEC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초청을 추진하겠다는 말도 했다. 개성공단 시범단지 착공, 경의선·동해선 철도 연결을 이끌었던 정 장관으로선 이런 유화책으로 대화 분위기가 바로 조성될 거라 생각했을 수 있다.
다만, 북한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데 우리만 무장 해제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국민 불안도 함께 헤아려야 한다. 평생 ‘북한은 주적(主敵)’이라고 배웠는데, 새로운 장관이 ‘주적이 아닌 위협’이라고 한다고 선뜻 동의할 국민이 몇 명이나 될까. 56년 만에 ‘통일부’ 명칭에서 ‘통일’을 삭제하려면 국민이 굳이 왜 그런 수고를 감수해야 하는지 상세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한다.
정 장관은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 참배 소식을 알리며 “왜 감정이 격해졌는지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정 장관 개인에게 DJ는 한반도 평화의 상징이겠지만, 상당수 국민은 DJ를 대북송금 사건의 당사자이자, 북한 핵무기 개발의 조력자로 기억하고 있다. 진보 정권 대북정책에 대한 국민 공감대가 부족하다면, 정권은 뒤로 빠지고 문화·경제 교류의 힘을 먼저 빌려 오는 것이 순서다.
우리 정부가 100m 달리기하듯 치고 나간다고 경색된 남북관계가 몇 달 만에 해결될 리 없다. 정교하게 계산된 전략에 따라 긴 호흡으로 추진해야 할 문제다. 김소월도, 탁구도, 드라마도 좋다. 남과 북에 깊게 뿌리 내린 장삼이사들의 마음에 기댈 필요가 있다. 정권의 명운을 걸었던 2018년 남북정상회담보다 넷플릭스와 북한 USB에 담긴 문화 콘텐츠가 더 깊숙하고 근본적인 변화를 끌어낸 전례가 있다. 언젠가는 김정은도, 문재인도 깨지 못한 벽을 남과 북 보통 사람들이 유유히 넘어설 그 날을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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