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윤중식의 ‘봄’ 담긴 과자 박스

리미티드 에디션에 사람들 몰려

 

알아주지 않는 실향민 작가 작품

옥션에서도 유찰돼 헛헛한 마음

 

아픔과 그리움 서린 우리 미술

빚진 우리가 더 많이 사랑해야

요즘 신조어에 ‘뮤지엄힙’이 있다. 뮤지엄에 다니는 것이 왠지 ‘힙’해(고유한 개성과 감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최신 유행에 밝고 신선하다) 보이는 시대가 드디어 왔다. 명품 매장이 아니라 박물관이나 미술관 앞에서 오픈런 하는 이들이 생겨났으니, 미술관 종사자로서 감회가 새롭다.

일주일 전 광복절에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에서도 오픈런이 있었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향수(鄕愁), 고향을 그리다’전이 열리는데, 개관 전부터 양산 쓴 사람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특별히 광복절에는 어느 재단에서 후원한 초코파이 박스를 선착순 80명에게 무료로 제공한다는 소식이 전해져 있었다. 그 초코파이 박스를 받기 위해 아침 일찍 대전에서 올라왔다는 사람도 있었다.

과잣값보다 대전∼서울 왕복 교통비가 더 들 것 같은데, 대체 이 박스가 과자 가격 이상의 가치를 갖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박스 자체의 희소성 때문이 아닐까?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제작된 이 박스 포장지에는 화가 윤중식의 ‘봄’이라는 작품 이미지가 들어 있었다. 이 아름답고 정겨운 작품이 그려진 상자도 받고, 미술관에서 직접 작품 원화도 감상하는 경험. 그것을 위해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흔쾌히 투자하는 것일까? 참 모를 일이다.

다만, 이 대목에서 내가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윤중식이 1975년 ‘봄’을 그릴 때의 ‘마음’ 같은 것이다. 윤중식은 1913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김환기와 같은 나이이다. 그러나 김환기가 전남 신안에서 태어나 도쿄·파리·뉴욕을 누비고 다녔다면, 윤중식은 1930년대 도쿄에서 서양화를 배우긴 했어도 다른 나라에는 나간 적이 거의 없었다. 또한, 김환기가 세계 미술과 동시대적으로 호흡하고자 시대와 환경이 변할 때마다 작품 양식을 바꿔 나갔고 그래서 말년에는 전면에 점을 찍은 추상화를 그린 반면, 윤중식은 2012년 99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서울의 성북동 아틀리에에서 평생 비슷한 구상화만 그리고 또 그렸다.

‘봄’도 마찬가지다. 윤중식이 환갑을 넘겨 62세에 그린 그림. 그는 늘 그랬듯이 비둘기와 나무, 초승달과 여인들, 먼 풍경과 강 위의 다리 같은 것을 그렸다. 대체 여기서 ‘봄’의 요소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직도 나뭇가지는 앙상하기만 한데 말이다. 사실, 화가에게서는 봄의 ‘형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봄은 단지 은유적인 표현일 뿐이다. 따듯하고 포근한 것, 생각하면 마음이 환해지는 것, 겨울이 지나면 돌아오기로 된 어떤 희망, 그리고 그 희망을 향한 순수한 기다림. 그런 것이 윤중식의 ‘봄’의 은유인데, 사실 그 실체는 다름 아닌 화가의 ‘고향’이다.

윤중식은 작품 제목을 ‘봄’이라고 하든 ‘석양’이나 ‘평화’라고 하든 언제나 같은 것을 그렸다. 바로 자기 고향. 화가가 나고 자란 평양 대동강의 기억이었다. 그는 6·25전쟁 중 부모를 평양에 남겨둔 채 피란을 떠나야 했고, 피란 도중에 아내와 딸과 헤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그 후 한 번도 다시는 가보지 못한 땅, 생사조차 알 수 없는 가족이 남겨진 곳, 나이가 들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그 고향의 풍광을 그는 그리워하고 또 그릴 수밖에 없었다.

윤중식과 같은 실향민 화가들의 작품이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을 가득 채우고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 근대 미술사는 상당 부분 수많은 실향민 화가의 그리움에 빚진 결과이다. 우리가 잘 아는 국민화가 이중섭도 전란에 가족과 고향을 잃은 실향민이다. 이중섭은 원산폭격을 피해 급히 수송선을 타면서 어머니를 북쪽에 두고 내려왔다. 사람들은 이중섭의 가족을 향한 그리움을 아내와 두 아들을 향한 것으로만 주로 얘기하곤 한다. 하지만, 실은 이중섭의 내면 깊은 곳에는 북에 남겨진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도 컸으리라. 이중섭의 마지막 작품은, 눈 내리는 밤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오는 어머니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다른 국민화가 박수근도 고향은 강원도 양구이지만, 6·25전쟁이 터졌을 때는 북한 땅 금성에 온 가족이 모여 살았다. 그는 전쟁 중 쫓기는 몸이 되어 혼자 38선을 넘어야 했다. 나중에 남하한 가족을 서울에서 상봉하긴 했지만, 박수근이 그 과정에서 겪은 고통을 어찌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참으로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마치 화강암과 같은 표면 질감을 만드느라 애쓴 박수근은 자신의 희끄무레한 작품들 속에 늘 ‘봄’의 희망을 은유적으로 숨겨두었다.

이들뿐이 아니다. 평양이 고향인 최영림·홍종명·장리석, 해주에서 내려온 박성환, 정주와 사리원에서 각각 태어나 대구에 정착한 전선택과 신석필. 이들 사연 많은 실향민 화가의 먹먹한 그리움이 덕수궁 전시장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다. 이들은 이상하게도 붉은색, 검붉은색을 작품에 많이 썼다. 꿈엔들 잊을 수 없는 고향의 모습은 그렇게 타오르듯 붉고도 아련하다.

우리는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실제로 현실은 거꾸로 작동한다. 사람들이 기억해 주어야 그것이 역사가 된다. 김환기의 작품은 많은 이에게 회자하면서 작품 가격도 수십억 원에 이르렀지만, 같은 세대의 윤중식은 아직도 사람들이 별로 알아주지 않는다. 얼마 전 한 옥션에서 윤중식의 아름다운 소품이 400만 원에 나왔는데도 유찰되는 것을 보고 씁쓸한 기분마저 들었다. 400만 원이 작은 돈은 아니지만, 우리가 우리 화가들에게 이만한 돈을 들일 여유나 관심도 없는 걸까? 역시 초코파이 박스는 공짜여서 좋아한 걸까? 이런 헛헛한 생각을 하면서 윤중식의 ‘봄’이 그려진 초코파이 박스를 부질없이 바라본다.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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