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융합연구원장
美 포츠머스 해군조선소 쇠락
한국 마스가 없인 재기 불가능
조선 뺀 러일전쟁 종전의 흔적
한미 정상회담 잘됐지만 미완
호혜성과 의존성 키워 나가야
외교戰에선 국론 통일 더 중요
미국 북동부 피스카타콰 강을 따라가면 1800년에 세워진 포츠머스 해군조선소가 보인다. ‘과거를 자랑하며, 미래를 준비한다’(Proud of Our Past, Ready for the Future)라는 표어 아래 이곳은 두 차례 세계대전과 냉전기를 거치며 미 해군력의 상징으로 자리해 왔다. 그러나 지금의 미국은 사정이 다르다. 중국 해군은 이미 400척으로 팽창했지만 미국은 280척에 머물고, 국내 조선업은 쇠락해 노후 함정 수리조차 버겁다. 이런 가운데 한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구호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변주해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세계적 수준의 조선 기술을 앞세운 협력은 미국의 관세 요구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데 기여했고, 조선소의 표어를 바라보는 순간 한국이 이제 미국의 필수 파트너라는 뿌듯함이 스며든다.
하지만 강 건너 뉴햄프셔주 뉴캐슬 섬 호텔이 불러오는 기억은 차갑다. 1905년 이곳에서 열린 포츠머스회담은 러일전쟁을 종결지었고, 양측 대표단은 두 달가량 머물며 조선소 건물 86호에서 협상을 이어가 최종 조약을 체결했다. 중재자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그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세도정치와 권력다툼, 친일·친러·친미로 갈라진 외세 의존 속에서 무력해진 대한제국은 당사자임에도 열강의 협상 구조에서 철저히 외면당했다. 결국, 한국에 돌아온 것은 단 한마디 상의도 없는 주권 상실과 강제된 을사늑약뿐이었다. 지금 호텔 벽에는 영어와 일본어로 된 커다란 ‘평화협약의 여정’(Peace Treaty Trail) 지도가 걸려 있지만, 한국의 희생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포츠머스의 ‘평화’는 강자들의 영예였을 뿐, 한국에는 치욕으로 남았다.
120년이 지난 지금, 장면은 달라졌지만 ‘낯선 기시감’이 겹친다. 지난주 열린 첫 한미 정상회담은 ‘성공적 상견례’로 평가됐지만, 실질은 공허했다. 국방비·안보·경제·에너지 등 주요 현안은 모두 ‘추후 협의’로 미뤄졌다. 미국은 한국이 절실히 원한 자동차·반도체·철강 관세 조정을 거부했고, 오히려 한국의 투자금을 자국 인프라와 안보 재원에 재량껏 활용하겠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마스가라는 협력 구호 뒤에는 한국을 동등한 파트너가 아닌 ‘투자원’으로만 보는 시각이 자리한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포츠머스에서 한국이 세력 균형의 희생양으로 전락했던 기억이 다시 떠오른다.
물론 오늘의 한국은 1905년과 다르다. 이제 우리는 세계가 귀 기울이는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우리의 선택은 국제질서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원칙과 전략이 더욱 중요하다. 동맹은 단순한 유지가 아니라, 안보·경제·기술 협력을 넘어 원자력·조선 산업까지 확장해 상호 의존성을 높여야 한다. 협상에서도 방위비·투자·통상에서 호혜적 원칙을 분명히 하고, 일본·호주·유럽연합(EU)·캐나다 등 민주적 파트너와 연대해 협상력을 강화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세계무역기구(WTO)와 유엔 등 다자 규칙을 흔들수록, 한국은 민주주의와 법치에 기반한 다자주의를 지켜내야 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그 방향을 잘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노골적인 약육강식 앞에서 유럽은 침묵하지 않았다. 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과 현실적 위기의식이 결합해 강력한 연대를 만들어냈고, 전장의 참상을 드러낸 미디어와 분노한 여론은 정치권의 결단을 압박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안보와 번영이 곧 세계의 안전과 이익에 직결됨을 국제사회에 설득하고, 행동으로 다자 연대를 입증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은 ‘민주적 다자주의의 허브’로 국제 협력의 중심에 설 수 있다.
포츠머스의 강은 오늘도 흐른다. 과거 한국의 주권 상실을 묵인한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증언했던 이 강은, 오늘날 미 해군력 부활에 한국의 협력이 필수임을 일깨운다. 외교는 전쟁이며, 트럼프 시기처럼 동맹조차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는 현실에서 내부 정쟁에 매몰된다면 한국은 또다시 과거의 포츠머스에 머물 수밖에 없다. 지금 필요한 건 분열이 아니라 국익을 위한 단결과 연속성 있는 치밀한 외교 전략이다.
특히, 한미 정상회담이 성공했다고 정부·여당과 지지층의 큰 박수를 받았다. 박수 뒤의 불안을 우려하는 반대편의 쓴소리를 경청하는 용기, 바로 거기서부터 진짜 실용외교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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