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섭 중앙대 명예교수·정치학

 

자주·친중 노선 폐기는 바람직

운전자론 환상, 안미경중 허상

현실적 新외교 전략 수립할 때

 

한미동맹 강화 옳은 방향이나

트럼프 개인에 과잉 의존 위험

보수적 현실주의가 외교 등대

이재명 대통령이 8·25 한미 정상회담에서 외교적으로 이룩한 가장 큰 성과는, ‘한반도 운전자론’으로 상징되는 대북 자주노선과 ‘셰셰’ 외교로 표현되는 친중 노선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한반도 운전자론은 우리 민족끼리 남북관계를 주도해야 한다는 진보적 통일론이며, 안미경중(安美經中)론은 안보는 미국에 의지하되 경제는 중국과 협력하겠다는 일종의 균형자론이다. 이 대통령은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연설 후 대담에서 밝혔듯이 미중 전략 경쟁의 격화에 의해 안미경중 노선을 사실상 채택할 수 없다고 했다. 현실적 외교 노선으로 돌아섰음을 보여준다.

이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한반도의 피스메이커가 되어 달라”고 요청하고, 본인은 “페이스메이커를 하며 열심히 지원하겠다”고 했다. 이는 한국이 남북관계와 관련해 ‘운전석’에서 스스로 내려와 ‘조수석’에 바꿔 앉겠다는 의사 표명이다. 북한은 오래전부터 한국을 배제하고 미국과 직접 협상을 벌이는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을 고수해 왔다. 그런데 이제는 한국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에게 북한과 대화를 의탁하면서 평화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국 스스로 통미봉남 구도를 재현한 것으로, 자율적 당사자에서 평화 요청자로 전락한 것이다.

중국에 관련해서도 안미경중 노선을 사실상 포기했다. 이 대통령은 “한국은 더 이상 미국의 기본 정책에서 벗어난 선택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이는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이중 구도가 더 이상 통하지 않음을 인정한 것이다. 사실 안미경중은 한국 외교의 현실적 타협이었으나, 미국의 전면적 압박과 중국의 경제 보복 위협에서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이제, 대통령이 한국은 경제·안보 모두 미국 중심 체제에 편입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러한 표명은 실용적 현실주의의 시각에서 보면 늦었지만, 바람직한 전환이다.

외교 내용상으로 국익에 유리한 선택을 했어도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 즉, 운전자론과 안미경중 포기를 선언하는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제도화된 동맹에 근거해 전략적 선택을 했다기보다는 트럼프라는 특정 인물에게 의존하는 모습이었다. 한미동맹은 정권이나 개인의 선호에 좌우되지 않는 국익에 근거한 제도적 기반이어야 한다. 대통령이 ‘피스메이커’를 트럼프 개인에게 요청한 것은 한국 외교가 불안정한 사적(私的) 의존에 기울 수 있다. 비현실적 외교 노선의 포기는 불가피했더라도 미국 국익에 근거해 상대국에 감내하기 어려운 요구를 자주 하는 트럼프 개인에게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다. 즉, 그의 예측 불가능한 판단력이 한미 관계와 남북관계에 어떤 내용과 형식으로 나타날지 모르는 위험성이 있다. 동맹 강화는 특정 인물에 대한 의존이 아니라, 제도와 전략의 공고화를 통해 한미 관계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처한 냉엄한 외교적 현실을 절감하고 좌파 외교의 허상을 걷어냈다. 운전자론은 주변 강대국이 한반도 정세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애초에 실현이 어려운 자기 환상이었다. 안미경중 노선도 미중 관계가 점점 대립적 관계로 변화하는 국제 환경 속에서 한미동맹의 당사국인 우리가 유지할 수 있다고 희망한 것도 허상이었다. 이를 포기한 것은 외교적 현실주의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제 현실적 토대 위에서 국익을 지키는 외교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다.

운전자론과 안미경중 포기는 냉엄한 국제 정세 인식의 결과이다. 국내 정치적으로 당시 국익 증진을 위해 필요했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과 이라크 파병을 결단한 노무현 대통령에게 좌파들은 진보 노선을 배반했다고 비판했다. 이번에 현실주의로 전환한 이 대통령에게 자주 노선을 포기한 친미주의자라는 주홍글씨로 낙인 찍을 수는 없다. 다만, 외교 허상을 버린 자리를 무기력한 의존으로 채워서는 안 된다. 경제나 외교에서 보복을 계획할 중국에 대해 충격을 최소화할 보완책이 마련돼야 한다. 우리 외교가 국익을 지키려면, 자주라는 이념을 앞세울 게 아니라 냉철한 보수적 현실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김호섭 중앙대 명예교수·정치학
김호섭 중앙대 명예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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