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식 주필
호남 정신 핵심은 절제와 품격
DJ 망명일기 나오는 진짜 측근
자리 요구하지도 주지도 않아
李정권은 민주주의 제도 위협
권력과 정치의 저질화도 심각
지금 뿌린 대로 임기말 거둘 것
김대중 전 대통령을 도왔던 ‘진짜 비밀 측근’들이 반세기도 더 지나 드러났다. 최근 출간된 ‘김대중 망명일기’에는 1972년 유신 비상계엄 선포를 전후해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반정부 활동을 할 때 자신을 도왔던 인사들이 실명으로 나온다. 호텔비 식사비 행사비를 부담한 사람, 비밀 연락책, 빚 4000만 원 등 처음 공개되는 내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일기장 존재를 생전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 만하다.
더 의미심장한 일은, 그들이 어떤 보상을 요구하지도, 어떤 보상을 해주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으로서 일본을 국빈방문해 그들을 만난 소회를 자서전에 남겼다. ‘밤에 초청해 술잔이라도 기울였으면, 오래 손이라도 붙들고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딱 한 시간 만나 밥도 같이 못 먹고 헤어졌다. 그날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사람도 있었다. 투쟁은 무엇이고 혁명은 무엇인지, 또 동지란 누구인지 참으로 허허로웠다.’
이재명 대통령의 변호인들이 호남 등지에 무더기로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이 되고, 친위대처럼 행동하는 것과는 정반대다. 권노갑 등 DJ 최측근 7명은 ‘DJ 정부에서 일체의 임명직을 맡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고, 그대로 지켰다. 호남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불린 홍남순 변호사 역시 공천과 공직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이런 절제와 품격이 DJ와 호남 정신의 정수(精髓)였다.
이재명 권력이 제1야당과 지지자들을 내란 세력으로 뭉뚱그려 척결을 외치지만, DJ는 정반대였다. ‘영원한 비서실장’ 권노갑의 회고다.(‘헌정’ 8월호 인터뷰) “당선 얼마 뒤 부르시더니 ‘자네하고 나하고 박정희 대통령한테 박해를 가장 많이 받았지만, 국민 통합을 하려면 모두 용서하고 기념사업회를 만들어야 할 것 같네. 내가 대통령으로서 명예이사장을 할 테니, 자네가 박근혜 씨와 부이사장을 맡아주게’라고 하셨다.” 그렇게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앞장섰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과도 화해했다. 대통령직을 박탈당하고 수감된 윤석열의 ‘속옷 버티기’까지 관음증 수준으로 돌려보고 은근히 유포하는 것을 어떻게 볼까.
초년 기자 시절 ‘재야인사’ DJ와 동교동계 취재를 맡았던 적이 있다. 요즘도 백발이 성성한 당시 취재원들과 만나 세상 얘기를 나눈다. 호남인은 다음의 세 가지에서 큰 긍지를 느낀다고 한다. 김대중, 5·18 민주화운동, 이순신 장군의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관통하는 관념은 민주주의와 헌신, 전라도 애향심을 뛰어넘는 애국심이다.
지난 일을 장황하게 돌아본 것은, 호남에서 몰표를 받는 정치 세력의 일탈이 도를 넘고 있기 때문이다. 판사가 더불어민주당 지침대로 판결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특별재판부를 만들려고 한다. ‘정치검찰’을 이유로 검찰청을 없애려 하면서, 이미 120명인 3개 특검의 특별검사를 170명으로 늘리려 든다. 특검이 ‘친민주당 검사’ 감별 장치로 작용할 판이다. 이 대통령의 재판이 재임 중 연기됐을 뿐인데, 재판 자체를 없애거나 사실관계를 뒤집으려고 애쓴다. 헌법과 충돌하고 시장경제 원리에 어긋나는 법을 마구 만들어 낸다. 온갖 갑질, 성 비위, 막말, 입시 비리, 세금 상습 체납 등 도저히 공직자 자격이 없는 사람도 같은 편이면 두둔한다. DJ와 호남 정신은 고사하고 반민주·양아치 정치가 우려될 지경이다.
실질적 민주주의를 공고화해야 할 시기에, 수십 년 힘겹게 쌓아 올린 제도적 민주주의를 도로 허무는 퇴행적 행태가 벌어지고 있다. 물론 보수 정치의 한심한 지리멸렬이 브레이크 없는 폭주를 부추기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작용은 반드시 그만큼의 반작용을 부른다는 뉴턴의운동법칙은 정치에도 적용된다. 최근 정치사를 보면, 야당이 잘해서가 아니라 여당이 스스로 무너지면서 정권 교체가 되는 경향이 뚜렷하다. 현 여권에도 그럴 조짐이 잉태되고 있다.
이 대통령은 국가재정과 관련, “옆집에서 씨를 빌려서라도 뿌려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 대통령은 씨앗을 빌리는 데 관심을 뒀지만, ‘뿌린 대로 거두리라’라는 이치의 본질은 어떤 씨앗을 어디에 뿌리고 어떻게 가꾸느냐에 방점이 있다. 이 대통령 취임 100일이 다가온다. 그런데 벌써 많은 나쁜 씨앗이 곳곳에 뿌려지는 것 같아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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