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새벽빛에 반짝이는 모습 보고

계시를 받은 듯 그리기 시작

 

달리 ‘우주의 중심’에 비유 후

귀국해서 연 첫 개인전 완판

 

염원·숭고한 사랑 담은 결정체

물방울은 그저 인생 그 자체

지금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김창열(1929∼2021)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92년의 일생 중 50년간 물방울만 그린 화가. 그런 삶을 상상해 보라. 과연 가능한 일일까? 세상에 그릴 것이 많고 많은데, 그는 왜 오직 물방울을 그리는 데만 반세기를 보냈을까? 그걸 어리석다고 해야 할까,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누군가 예술이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을 죽을 때까지 밀고 나가는 행위라고 했는데, 과연 그런 차원으로 이해해야 할까?

김창열이 살아온 얘기부터 해 보자. 그는 1929년 평안남도 맹산이라는, 호랑이가 출몰했던 두메산골에서 태어나 할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우며 자랐던 세대의 사람이다. 해방을 맞았지만, 체제 비판의 이유로 수배자가 되어 남으로 쫓겨 내려왔다. 6·25전쟁이 터졌을 때가 하필 21세라 징병을 피할 수 없었고, 전장에서 수많은 전우의 죽음을 목격했다. 전쟁 중 군대에서 나가려면 경찰이나 교도관이 되는 수밖에 없어(이 시기 화가 윤형근은 교도관으로 일했다) 간신히 경찰로 빠졌는데, 하필 발령지가 제주도였다. 4·3의 여파가 계속되던 곳.

처절한 시대적·개인적 상황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외국으로 나갔고, 단돈 5달러를 들고 찾아간 곳이 김환기가 있던 미국 뉴욕이었다. 그래도 예술가의 꿈을 버리지 못해 프랑스 파리 외곽의 한 마구간 건물에 자리 잡은 어느 날, 그는 캔버스 뒷면에 맺힌 물방울이 새벽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계시를 받은 듯 물방울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43세에 ‘발견’한 물방울을 김창열은 2021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렸다.

그가 평생 물방울을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세속적인 답변은 ‘잘 팔렸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물방울 그림이 잘 팔린 것은 사실이다. 김창열은 파리에서 처음 물방울을 그려 1973년 작은 동네 갤러리에 내놓았는데, 그 작품을 우연히 본 유명 평론가가 신문에 엄청난 호평을 실었다. 그 기사를 보고 살바도르 달리가 찾아와 방명록에다 김창열의 그림은 “페르피냥역(달리가 ‘우주의 중심’이라 칭했던 곳)만큼 아름답다”고 썼다. 그리고 달리가 그렇게 썼다는 사실이 신문 헤드라인이 되어 다시 기사화됐다. 그렇게 해서 김창열은 마구간에서 동거했던 프랑스인 부인의 부모로부터 결혼 승낙을 얻어냈다. 그리고 몇 년간 미친 듯이 물방울만 그렸다. 이 작품들을 들고 1976년 귀국해 현대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는데, 결과는 첫날 완판. 그렇게 김창열의 작품은 1970년대 한국 미술 시장을 견인한 신호탄이 되었고, 부잣집 거실에도 기업 로비에도 여기저기 걸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잘 팔렸기 때문에 계속 그렸다는 이런 세속적인 답변에 휘둘려, 김창열의 진짜 이야기에 우리는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 같다. 흥미롭게도 그의 대답은 세월에 따라 계속 달라졌다.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한때 그는 자신의 개인사에 기대어 이렇게 설명했다. “6·25전쟁 중에 중학교 동창 120명 중 60명이 죽었고, 그 상흔을 총알 맞은 살갗의 구멍이라고 생각하며 물방울을 그렸다. 근원은 거기였다.” 끔찍했던 전쟁 체험이 ‘구멍’이라는 원형에 대한 집착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신체의 저 깊은 곳에서 구멍을 뚫고 나오는 점액들, 피·땀·눈물이 모두 물방울의 근원인 셈이다. 실제로 그의 초기 작품은 내장이 터져 나온 듯 아프고 어둡고 처절하다.

또 어느 땐가 김창열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물방울은 정화수, 동자승의 오줌, 예수가 제자의 발을 닦아주는 물이라고. 무언가를 향한 간절한 염원과 숭고한 사랑이 모여 응결한 결정체가 물방울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구멍을 뚫고 나온 끈적끈적한 액체가 결국 말간 물방울로 정화된 것이다. 김창열은 내면의 고통과 불안을 잊기 위해 맑고 영롱한 물방울의 찰나적 아름다움에 집착했다.

한편, 노년에 이르러서는 이렇게 말했다. “물방울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도 그런 물방울처럼 되고 싶다.”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 욕심 없이 순수한 존재. 평생 무거운 죄책감과 책임감에 짓눌렸던 김창열에게는 진심으로 닮고 싶은, 가볍고 자유로운 존재가 물방울이었다.

건강이 나빠진 후 말년의 김창열은 왜 평생 물방울을 그렸느냐는 질문에 이렇게도 말했다. “그것밖에 그릴 줄 몰라서.” 이는 가장 유머러스하고도 정직한 답변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나는 이 답변을 가장 좋아한다.

그렇다면, 대체 물방울은 무엇이란 말인가? 눈물인가? 정화수인가? 아무것도 아닌가? 김창열의 아들 김시몽 교수가 이에 대한 답을 가장 잘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김창열)의 작품은 자신을 설명하거나 세상을 해명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처럼, 숨처럼, 걸음처럼 그려졌다.” 그렇다. 김창열에게 물방울은 그저 인생 그 자체였다. 애초부터 결론이나 정답은 없었다. 그것은 단지 살고 숨 쉬고 걸으면서, 붙잡고 매달리게 하는 화두 같은 것이었다.

우리에게도 그런 인생의 화두 하나쯤 필요하지 않은가. 인생이 그저 찰나의 허무에 불과함을 알면서도 부여잡고 나아갈 힘을 갖게 하는 질문.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금 미술관을 가득 메운 김창열의 물방울을 바라본다.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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