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권 논설위원
李정부 출범 후 헌법 정신 훼손
여당 권력 독점 다수 횡포 심화
‘개딸’ 대의민주주의 위기 불러
최고권력은 다수당 아닌 헌법
개헌 가능하지만 어겨선 안 돼
‘착취적 제도’는 번영 허물 것
202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제임스 A 로빈슨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한국의 경제성장은 단순히 저임금 노동력이나 외부 요인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헌법에 묻어 있는 혁신·투자·성장을 촉진하는 포용적 제도(inclusive institution)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8월 19일, 세계경제학자대회 기조 강연)고 강조했다.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 그리고 법치주의 등 핵심 가치와 제도가 지속적인 국가 발전과 번영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최근 정치적 갈등과 경제적 불평등 심화는 착취적 제도(extractive institution)로 회귀할 수 있다”고 경고하며 “한국이 정치적 투명성과 권력 분산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로빈슨 교수가 말한 포용적 제도란 사회 구성원이 정치적·경제적 권리와 기회를 보장받으며 자유롭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제도 체계를 말한다. 반면 착취적 제도는 소수 엘리트가 권력과 부를 독점하며 다수를 억압해 국가를 실패로 이끈다.
이재명 정부 들어 대한민국의 성공과 번영을 이끈 헌법 정신을 훼손하는 ‘착취적’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원청이 직접 근로 계약을 맺지 않은 하청 기업 근로자와 협상하는 기막힌 법안이 통과되고, 특정인 한 명을 쫓아내기 위해 기존 조직을 폐지하고 다른 조직을 신설하는 법안도 처리가 임박했다. 검찰청 폐지·공소청 신설 등 78년간 유지된 형사사법체계를 전면적으로 재편하는 법안은 별다른 후속 조치 없이 ‘추석 선물’로 통과될 예정이다. 문제점을 지적하면 “그때 가서 법을 개정하면 된다”(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는 식이다. 무(無)자격 논란의 최교진 교육부 장관, 직속상관을 ‘검찰개혁 5적’으로 칭한 임은정 서울동부지검장, ‘매변매직’이란 비판을 받는 이재명 대통령 사건 담당 변호사의 공직 임명 등 인사도 국민 분열과 정치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야당인 국민의힘의 정당 해산을 주장하며 상대하지 않고 있다. 정권 교체로 다수당 폭주를 막았던 대통령 재의요구권(거부권)은 무용지물이 됐다. 로빈슨 교수가 경고했던 ‘권력 독점, 다수 횡포’를 막는 브레이크가 없는 상태다. 더 심각한 것은 민주당 소수 강경 지지층이 정치를 흔든다는 점이다. 대통령실과 여당 대표의 동의를 얻어 여야 원내대표가 합의해 발표했던 3대 특검 완화 개정안과 금융위원회 조직 개편안 ‘빅딜’이 이른바 ‘개딸’(개혁의딸)의 반발로 14시간 만에 파기됐다. 정치의 주객이 전도된 사태로,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다. 정치에서 관용과 자제는 사라졌고, 다수결 원리는 다수의 횡포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됐다. 프랑스 정치학자 알렉시 드 토크빌은 “민주주의에서 다수의 독주는 독재와 다를 바 없다”고 했다.
이 대통령은 100일 기자회견에서 “대한민국에는 권력의 서열이 있다. 최고 권력은 국민, 그리고 직접 선출 권력, 간접 선출 권력”이라고 밝혔다. 선출 권력인 입법·행정부가 임명 권력인 사법부 위에 있다는 것이다. 국가권력을 입법(헌법 40조)·행정(헌법 66조 4항)·사법(헌법 101조 1항)으로 삼등분해 남용을 막고, 서로 견제해 국민을 보호하라는 헌법 정신을 거스르는 말이다. “사법부는 입법부가 설정한 구조 속에서 헌법과 양심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라며 민주당이 추진하는 내란재판부의 위헌 논란에 대해 “그게 무슨 위헌인가”라고 했다.
이 대통령은 ‘국민주권’을 최고 권력으로 꼽았지만, 대한민국 최고 권력은 헌법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피하기 위해 사회 계약을 통해 국가가 탄생했고, 국가를 유지·운영하는 최고법이 헌법이란 걸 이 대통령도 알 것이다. 국민주권은 헌법을 바꿀 순 있지만, 이를 어길 순 없다. 국민주권을 앞세워 재판에 개입하는 것은 사법부 독립성을 보장한 헌법을 왜곡하는 일이다.
이 대통령이 향후 성공한 지도자 반열에 오를지, 실패한 대통령이 될지, 이도 저도 아닌 대통령이 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여건은 어느 대통령보다 좋다. 그러나 국운(國運) 최절정기인 지금이 쇠락의 시발점이라는 우울한 전망도 나온다. 지난 6월 4일 취임식에서 “나는 헌법을 준수한다”고 선서했듯이 헌법 수호자로서 책무를 수행하길 바란다. 대통령은 헌법 아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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