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美연구팀 ‘눈앞에 없는 사람·사물 추적’ 확인

 

유인원 보노보 지켜보는 앞에서

사육사 2명 가림막에 숨은 다음

1명 사진 보여주자 해당자 지목

 

사육사 숨은 가림막 이동시켜도

마음속으로 경로 따라가 찾아내

‘관계 유지’ 기초적 능력보유 시사

 

유아처럼 장난치는 행동도 발견

‘상대반응 예측’ 지능의 증거 해석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한층 부각되는 인간의 중요한 자질로 ‘사회적 지능(Social Intelligence)’이 거론된다. 자동화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인간만 할 수 있던 다양한 업무를 대체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과 소통·협업하는 사회적 지능이 고도로 필요한 직업은 여전히 AI로 대체되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인지적 지능은 이미 AI가 인간을 뛰어넘었지만, 의사소통과 팀워크 등은 여전히 인간이 AI보다 비교우위를 갖는 영역으로 평가받는다.

그렇다면 사회적 지능은 인간만의 전유물일까? 최근 나온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침팬지나 보노보 같은 유인원도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동료에 대한 정보를 마음속으로 추적하는 등 기초적 수준의 사회적 지능을 갖고 있다는 설명이다. 관찰 대상이 된 것은 언어와 도구 사용 능력으로 잘 알려진 보노보 ‘칸지(Kanzi)’다.

◇보노보의 숨바꼭질 실험=미국 존스홉킨스대 크리스 크루페니 교수 연구팀은 지난달 학술지 ‘영국 왕립학회지 B: 생물과학’에 게재한 논문을 통해 유인원이 눈앞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나 사물을 마음속으로 추적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연구팀이 택한 연구 방법은 다름 아닌 숨바꼭질이다. 칸지를 앞에 둔 채 사람이나 사물을 가림막 뒤로 숨기고, 칸지가 이를 찾아낼 수 있는지 알아보는 5개의 실험이 진행됐다.

실험 전에 칸지는 두 명의 사육사 중 제시된 사진과 일치하는 사육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도록 훈련을 받았다. 첫 번째 실험에서, 두 사육사는 칸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 개의 서로 다른 가림막 뒤에 숨었다. 칸지는 사진을 보고 해당 사육사가 있는 가림막을 가리켰는데, 칸지가 보여준 정답률은 우연에 따른 결과보다 훨씬 높았다.

두 번째 실험은 첫 번째 실험과 동일하지만, 사육사가 숨은 뒤 가림막 위치를 바꿨다. 칸지가 단순히 숨는 장면만 기억하는지, 마음속으로 이동 경로까지 따라가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이 실험에서도 칸지의 정답률은 우연적 결과보다 높았다. 칸지가 단순히 마지막으로 본 위치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표상(mental representation)’을 이용해 사람의 위치와 정체를 계속 추적한다는 의미라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청각 신호·사물에도 반응=세 번째 실험은 칸지가 청각 신호를 통해 사람의 존재와 위치를 일치시킬 수 있는지 알아볼 수 있도록 설계됐다. 먼저 두 사육사는 커튼 뒤에서 가림막 뒤에 숨었다. 칸지에게 사진을 보여준 뒤, 사육사들은 각각 ‘안녕 칸지!’라고 인사했다. 칸지가 목소리로 사육사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지 확인하는 실험이었다. 여기서도 칸지는 목소리를 통해 사육사의 위치를 찾을 수 있음을 입증했다.

네 번째 실험에선 사람 대신 사물이 동원됐다. 앞선 세 번의 실험에서처럼 사육사가 숨는 대신, 연구팀은 칸지가 보는 앞에서 열쇠와 숟가락을 가림막 뒤로 숨겼다. 물건의 사진을 보여준 뒤, 해당 물건이 숨겨진 가림막을 가리키도록 하는 실험이었다. 다섯 번째 실험은 네 번째 실험처럼 물건을 숨긴 뒤 가림막의 위치를 바꿔, 칸지가 사람처럼 사물의 이동 경로도 추적할 수 있는지 검증했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실험에서도 칸지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물의 위치와 정체를 마음속에서 추적하는 능력을 보여줬다.

이번 연구는 동료의 위치를 추적하는 사회적 지능이 사람뿐 아니라 침팬지나 보노보 같은 대형 유인원에게도 존재한다는 점을 처음으로 명확히 밝혔다는 의미를 갖는다. 사회적 대상을 공간적으로 마음속에 그릴 수 있고, 이를 토대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사회적 지능의 인지적 토대가 유인원에게도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인간만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유인원들에게도 사회적 파트너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기초적 능력이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연구팀은 실험의 의미에 대해 “보노보가 짧은 시간 안에 여러 행위자나 사물의 정체성과 위치를 정신적으로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며 “이러한 표상은 보노보가 사회 세계와 물리적 세계를 탐색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또 “인간과 가장 가까운 유인원 친척들이 이런 표상 체계를 공유한다는 것은 적어도 600만~900만 년 전 우리의 공통 조상에게도 이런 표상 체계가 존재했음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유인원도 유머 감각 있어=또 다른 연구진의 실험에선 유인원들에게도 인간처럼 기초적인 유머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난해 2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에리카 카트밀 교수 연구팀 등이 같은 학술지에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고릴라·오랑우탄·침팬지·보노보 4종의 유인원이 상대에게 장난을 치는 등 웃음을 이끌어 내는 행동을 하는 것이 확인됐다. 연구팀이 이들 4종의 유인원을 대상으로 상대를 놀리는 듯한 행동·동작·표정을 관찰한 결과, 4종 모두 인간 아기들이 장난치는 것처럼 상대를 향해 의도적으로 장난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2016년부터 2019년까지 미국 샌디에이고와 독일 라이프치히의 동물원에 사는 3~5세의 유인원들을 관찰했다. 미국에선 보노보 9마리·오랑우탄 4마리·고릴라 4마리, 독일에선 침팬지 17마리가 대상이 됐다. 그 결과 이들이 다른 동료 앞에서 신체 부위나 물체를 반복적으로 흔들거나, 뒤로 다가가 때리고 도망가는 등의 행동이 관찰됐다. 동료의 앞을 가로막거나, 머리털을 잡아당기는 등의 행동도 관찰됐다. 이들은 장난을 친 뒤엔 상대의 얼굴을 보면서 반응을 기다리고, 상대의 반응에 따라 같은 행동을 반복하거나 더 심한 장난을 치기도 했다. 이는 사회적 유대감을 쌓기 위해 동료들과 어울리는 ‘놀이’ 행동과는 구분된다는 것이 연구팀의 설명이다. 이렇게 유인원이 친구를 놀리는 방법은 모두 18가지에 이르렀다.

이들 행동은 인간 아기가 어른들의 웃음이나 관심을 이끌어 낼 때 하는 행동과 유사하다고 연구팀은 밝혔다. 아기들의 장난스러운 행동은 말을 하기 전인 생후 8개월 전후에 관찰된다. 부모에게 물건을 내밀었다가 뺏고, 주의를 끌기 위해 다른 사람의 행동을 방해하기도 한다. 말로 하는 농담 대신 몸으로 하는 장난을 먼저 하는 셈이다. 이렇게 장난을 치기 위해선 자신의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예측하는 능력이 필요한 만큼, 높은 지능의 증거로도 해석될 수 있다. 연구를 주도한 이자벨 라우머 독일 막스플랑크 동물행동연구소 박사는 “진화론 관점에서 보면 유인원 4종 모두 상대에게 장난을 치고, 유아의 유머 행위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인간과 유인원이 적어도 1300만 년 전 공통 조상에게서 분리돼 진화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조재연 기자
조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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