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낙엽이 될 것이다/ 노란 은행잎으로 떨어져 거리의 발아래 짓밟힐 것이다/ 버스 정류장 앞 매대에 놓인 국화분이 되어 매연과 먼지에 숨 막힐 것이다/ 꽃다발을 들고 버스를 탄 소녀의 꽃이 되어/ 쓰레기통에 곧 버려질 것이다

- 정호승 ‘식물인간 향후추정서’(시집 ‘편의점에서 잠깐’)

몇 차례 비가 오고 제법 선선해졌다. 옷장 앞에 서서 망설임이 길어진다. 밤이 되면 산책을 나서곤 한다. 건조해진 공기를 마시고 나면 잠이 잘 온다. 명실상부 가을 초입. 입추는 진즉에 통과했지만, 어쨌든 계절은 때를 놓치지 않는다.

유모차에 탄 아기가 낙엽을 가리키며 낙엽 하고 외친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가 낙엽을 아는 게 기특하다. 낙엽과 가을을 연관시키는 게 놀랍다. 맞아 맞아. 싱글벙글 맞장구를 치며 유모차를 민다. 나는 이제 막 가을을 배운 아기가 부럽다. 굳이 세어볼 필요 없이 많은 가을이 아이에겐 있을 것이다. 나는 내 몫으로 남은 가을이 초라하다 싶어 공연히 뒷짐을 진다. 무언가를 감추려는 듯,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억으로 남은 지난가을 역시 내 것이 아닌가. 돌이켜 보면 모두 생의 일이다. 울창한 초록의 나뭇잎의 시절도, 갈변하여 아름다워지는 단풍의 시절도, 마침내 바짝 말라붙어 떨어지고 마는 낙엽마저도. 길가 플라타너스를 올려다본다. 아직 여름의 기억을 놓지 못하고, 그러나 조금씩 물러가는 풍경. 제법 살아본 것 같고 아직 한참 남은 것도 같은 모양이 내 삶의 은유인 것만 같아서 코끝 찡하고 괜히 아찔해지고.

가을 채비를 생각한다. 당장은 서점의 일을 돌봐야 한다. 또, 내 삶의 한 국면과 마주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제는 거두어들여야 할 때임이 분명하다. 아쉬워하지도 섭섭해하지도 말아야지. 아, 이런. 나 가을 타는 모양이다.

시인·서점지기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