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호열 고려대 공공정책대학 명예교수

이재명 대통령의 23일 유엔총회 연설은 지난 80년간 유엔과 함께한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회고하는 동시에 국정 문란을 극복하고 민주주의 복원을 공식화한 의미 있는 자리였다. 최근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 한반도 평화와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한 새로운 구상, 즉 ‘교류(Exchange), 관계 정상화(Normalization) 그리고 비핵화(Denuclearization)’의 영문 첫 글자를 따서 E.N.D로 명명하고 이를 남북 대결과 한반도 냉전을 종식시킬 이니셔티브라고 발표했다.

이 대통령의 E.N.D 이니셔티브는 현 정부 대북정책의 기조를 국제사회에 공표한 것이며 취임 초부터 강조해 온 실용외교의 구체적 포석이라 매우 중요한 구상이지만, 본래 의도와는 달리 한반도 위기를 고조시킬 수 있는 만큼 시급히 재고돼야 할 정책 구상이다.

이 대통령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한반도 안보 위기의 핵심인 북핵 문제에 대한 유엔의 대북 제재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았다. 유엔 안보리는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 이후 상임이사국을 포함해 만장일치로 북한의 핵실험을 비난하고 포괄적 제재를 결의했다. 이후 북한이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할 때마다 제재와 압박의 수위를 계속 높여 왔다.

미·중 갈등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사회가 분열되면서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효과가 감소한 것은 사실이지만, 북·러 밀착과 북·중·러의 전략적 협력 관계가 노골화하는 시점에도 유엔 안보리 차원의 대북 제재가 여전히 유효한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 대통령도 인정했듯이 북한의 비핵화가 시간이 걸리는 난제임에도 불구하고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는 북한 핵개발의 불법성을 공인하고 한반도 비핵화의 현실적 지렛대로서 중요한 조치인데도 당사자인 우리 스스로가 이를 훼손한 셈이다.

중단된 남북대화를 재개하고 교류 활성화를 통해 남북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 이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 구상의 핵심이고 실용외교라면, 한반도 비핵화는 다른 어떤 현안보다 치밀하고 체계적인 로드맵 작성이 선행돼야 한다. 북한은 이미 핵무력을 고도화했고 핵을 통해 체제를 공고히 하면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담판을 벼르고 있다. 그런데도 당사국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유엔 안보리가 20년 동안 유지해온 북핵 문제 해법을 유야무야로 돌리려는 접근 방식은 유엔이 창설 때부터 견지해온 국제 안보의 다자주의 원칙과 핵확산방지 노력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이율배반적 구상이다.

이 대통령이 대한민국과 유엔의 관계를 극적으로 미화하면서도 6·25전쟁과 유엔의 집단안보 행동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것 또한 부적절했다. 탈냉전 이후 조성됐던 자유롭고 개방적인 세계화가 퇴조하고 중국과 러시아 등 권위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블록화가 진행되는 와중이라 우리의 입지가 매우 어려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정치적 메시지가 중요한 유엔총회에서 침략자를 격퇴한 유엔의 업적을 상기하지 않은 것은 그 진정성을 의심받게 한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는 유엔의 역할과 기능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탈냉전 이후 미국 주도로 안정적이던 국제질서가 위협받는 요인 중에 북한의 핵개발도 한몫한다. 당사국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한반도 안보의 중요성과 올바른 해법을 국제사회에 소상히 소개하고 그 정당성의 바탕에서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조를 구하는 게 당연하다. 불완전한 E.N.D 구상 대신 제재(Sanction)를 지렛대로 대화(Talks) 아니면(or) 징벌(Punishment), 즉 북한이 핵개발을 지속할 명분을 제거하는 ‘STOP 구상’을 천명함으로써 유엔의 권능과 책임을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과 전체 회원국들에 상기시키고 글로벌 중추국 대한민국의 국격과 위상을 알릴 좋은 기회였는데 아쉬운 유엔총회 연설이었다.

유호열 고려대 공공정책대학 명예교수
유호열 고려대 공공정책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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