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 前 駐유엔 대사
질서와 가치 혼돈 갈수록 심각
중국 아닌 동맹 때리는 트럼프
국내에선 삼권분립조차 흔들
탈원전과 ODA 삭감은 큰 문제
엽관제 재현한 유엔대사 인선
상식 따르고 여론에 귀 열어야
미국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는 저서 ‘폭정에 대하여:20세기의 20개 교훈’의 결론에서 현시대 상황을 묘사하며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인용했다. “세상이 뒤틀려 버렸다(The time is out of joint).” 아버지의 유령으로부터, 삼촌이 아버지를 독살하고 왕위 찬탈 후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엄청난 얘기를 듣고 뱉은 비탄의 소리다. 질서와 상식이 전도되고 가치 혼돈의 상태에 빠진 요즘 세상에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다.
국제 평화와 안전을 지키는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이 유엔헌장과 국제법으로 금지된 전쟁을 일으켜 주권국 영토를 침탈했다. 홀로코스트 희생 위에 세운 나라가 이제 가해자가 돼 국제사회로부터 대량학살의 원흉으로 비난받는다. 선거로 선출되고도 권력 유지를 위해 반인권적 비자유 민주주의로 돌아서는 나라가 늘고 있다.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를 선두에서 수호해야 할 책임 있는 국가들이 북한의 불법적 핵개발의 뒷배가 된 현실은 어떤가. 막강한 국력과 도덕적 가치로 팍스 아메리카나를 이끈 나라가 일방적 보호무역주의에 파묻혀 애초에 조준했던 중국에서 벗어나 엉뚱하게 동맹국들을 공격하고 있다. 이렇듯 제2차 세계대전 후 신봉해 왔던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의 기본 가치들이 무너져 내리면서 안보와 경제 면에서 대외 의존도가 큰 우리에게 미증유의 도전적 상황을 던져준다.
눈을 국내로 돌리면, 과거 대통령 중 독선과 독단에 의한 통치로 나라를 잘못 이끈 여러 사례를 봐 왔다. 불통과 국정농단과 같은 통치 스타일의 실패도 있었고, 소득주도성장, 탈원전 및 장밋빛 대북관 등 정책적 결함도 있었다. 가장 최근엔 법을 전공하고 누구보다 자유를 외치던 대통령이 위헌적 계엄령 선포로 온 세상을 경악시킨 뒤 탄핵심판을 받고 파면됐다. 그리고 이를 내란으로 몰며 정권교체를 이룬 지금의 여당은 이제는 아예 야당을 해산시킬 기세가 등등하다.
급기야,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근간인 삼권분립과 견제·균형의 원칙을 무시하며 국회가 사법부 위에 군림한다는, 나라의 뿌리를 흔들 만한 위헌적 논리를 폈다. 3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 방식과 관련, 대통령이 미국 ‘타임’과의 회견에서 밝힌 정상회담 당시의 어려움과 관세 후속 협상의 불협화음을 보면 합의문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된 회담이었다던 대통령실 대변인의 발표는 사실을 숨기고 국민을 오도한 게 돼 버렸다.
여론 경청은 정부의 중요한 기능인데, 노란봉투법이 기업의 경쟁력을 훼손하고 국내 투자를 악화시키게 된다는 여론엔 귀를 닫았다. 인공지능(AI)으로 인한 미래의 엄청난 전력 수요를 원전(原電) 없이 신재생에너지로는 충당할 수 없다는 전문가 목소리와, 미국·유럽연합(EU)·중국 등 주요국들의 원전 확충 추진 움직임도 외면한다.
국제사회에서 경험과 역사를 나누는 선도국가가 되겠다는 대통령의 9·23 유엔총회 연설이 진정이려면 내년도 대외원조(ODA)예산안의 18% 삭감 계획은 재고돼야 한다. 대통령 변호인으로 활동한 인사들을 고위직으로 계속 기용하는 상황에 고개를 갸우뚱하던 차에, (다자)외교 자체에 문외한인 동류의 변호사를 주유엔대사로 보내는 모습을 보며 미국의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능력주의(meritocracy)에 반(反)해, 고위직 자리를 전리품 나눠주듯 했던 엽관제(spoils system)의 재현을 보는 듯하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평가받는 것은 그가 상식으로 나라를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제는 상식은 마치 산소와 같아서 위로 올라갈수록 희박해진다는 데 있다.
대통령은 취임 100일 회견에서 ‘회복과 정상화’를 말하며 ‘도약과 성장’을 약속했지만, 세간엔 다산 정약용의 표현대로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는(傷時憤俗·상시분속) 사람이 많다. 대통령은 원칙과 상식, 통합의 차원에서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햄릿은 비탄의 절규 뒤에, 뒤틀린 세상의 관절을 바로잡겠다는 사명을 완수했다. 오늘날 국내외로 어려운 시대 상황에서 대통령은 거침없는 화법에만 그치지 말고 통합과 협치(協治)의 초심 속에 건전한 여론에 귀를 열고 상식을 따르기 바란다. 그것이야말로 대통령이 말하는 실용주의가 진정으로 성공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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