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 (60) 무의미
‘세상 만사 헛되다’
전도서 1장 2절에 기록
‘인생은 걷는 그림자’
셰익스피어 희곡에 쓰여
의미는 어디서 생기나?
언어학·정신분석학 관점서
무의미는 ‘의미의 기원’
타자는 늘 내게 들이닥쳐
이해·용서·사랑·실망…
관계의 의미 계속 변화시켜
무의미가 삶을 덮친다.
대체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며, 걸음을 옮겨도 모든 길은 무의미로 차단되어 있다. 삶은 무의미 앞에서 전부 무너져 버린다. 병에 걸리고 사고를 당한 사람들은 무의미를 자신의 신체 전체를 통해 뼈저리게 느끼며 누구에게 던져야 할지 모를 질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왜 암에 걸렸을까? 내가 왜 팔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을까? 왜 내가 풍을 맞았을까? 질문을 던진들 신은 자기 일이 아니라서 대답이 없고, 스물네 시간 떠나지 않는 아무런 대가 없는 고통은 그저 무의미하다. 나날을 지탱해 온 모든 의미가 파괴된 자리에 이 무의미가 들어선 인생은 쓰디쓰기 짝이 없다.
세월을 셀 수 없이 멀리 거슬러 올라가는 먼 옛날부터 인간은 늘 이런 무의미와 마주했기에, 인간의 보편적 삶을 기록한 어떤 옛 경전은 이렇게 삶의 무의미를 확인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전도서, 1:2, 공동번역)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을 희생시키며, 삶이 쓰다는 것을 알려준 셰익스피어는 맥베스의 입을 통해 삶의 무의미를 이렇게 확인한다. “인생이란 걷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불쌍한 배우처럼 주어진 시간 동안/무대에서 활개 치고 안달하다,/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네./그것은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소음과 광기로 가득 차 있으나,/아무런 의미가 없구나.”(최종철 역)
세상 어디에서도 의미 있는 자리를 찾지 못하고 여분의 존재로서 떠도는 삶도 드물지 않다. 우리는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의 주인공에게서 그런 삶의 모습을 목격한다. “내가 진정으로 ‘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처박힐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고 싶다…. 그러나 내 자리는 그 어느 곳에도 없다. 나는 여분(餘分)의 존재다.”(김희영 역) 의미 바깥에 남아도는 여분, 삶의 의미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된 이 인물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나는 살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또한 인간의 역사 속에는 전쟁이나 학살로 인한 무의미한 죽음이 언제나 넘쳐난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프랑스혁명 중에 이루어진 학살에 대해, 무의미한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의 죽음이란 배추 꽁다리를 잘라내거나 물 한 모금 꿀꺽 들이켜는 정도의 의미밖에 없는 더없이 냉혹하고 미련 없는 죽음이다.”(임석진 역) 여기서 의미라고 말한 것의 정체는 그저 무의미이다.
더 이상 삶을 지속할 수 없도록 갑자기 나타나 가로막는 이 무의미를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도 의미가 무의미와 맺고 있는 적대적이면서도 가까운 관계를 알지 못한다면, 삶을 무의미라는 포식자에게서 구해내지 못할 것이다. 무의미는 의미의 세포를 갉아먹는 암세포처럼 삶을 잠식해 들어오는 듯하다. 그러나 사실 무의미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원천이다. 삶은 무의미로부터 솟아오르는 것이다. 이 당혹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먼저 말의 차원에서 살펴보자. 실제로 무의미한 말들이 있다. “아브락사스, 스나크, 혹은 블리투리같이 무의미한 단어” 말이다.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들고 있는 무의미한 말의 예이다. 아브락사스는 고대 그리스의 주문, 스나크는 작가 루이스 캐럴이 만든 조어, 블리투리는 로마 시대 철학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의성어로 모두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그런데 무의미한 말은 그저 무의미에 그치는 것일까? 사람들은 많은 경우 의미를 ‘원래 있는 것’으로 보고, 무의미는 이런 의미의 ‘결여’로 생각한다. 그러나 애초부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의미가 어디서 왔느냐는 의미의 기원에 관한 물음에 대해, 신에게서 왔다는 신학적 가설로 답하기 싫다면, 우리는 의미의 기원으로서 무의미를 생각해야만 한다. 의미의 기원으로서 무의미 말고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은 문제의 자리를 옮기는 것일 뿐이다. 기원이 되는 또 다른 의미는 어디서 왔냐는 물음이 다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미의 기원으로서 우리는 의미 아닌 것, ‘무의미’ 외에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들뢰즈의 다음과 같은 문장들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의미의 논리’에서의 구절이다. “의미는 언제나 하나의 결과, 하나의 효과이다.…심층에는 의미의 무의미가 있으며, 이 무의미로부터 의미 자체가 생겨난다.”(이정우 역) 그는 또 이렇게 강조한다. “무의미란 의미를 지니지 않은 것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의미 줌을 수행함으로써 의미의 부재에 대립한다.”
무의미가 의미를 준다는 것, 의미를 생기게 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볼 수 있을까? 예를 든다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작가 루이스 캐럴은 재미있는 말장난을 하기 좋아한다. 들뢰즈가 ‘의미의 논리’에서 다루듯, 캐럴은 ‘스나크 사냥’에서 무의미로부터 의미가 출현하는 원리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Rilchiam’이란 무의미한 단어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군가 ‘너는 어느 왕 휘하에 있는 자인가’라는 심문을 받았다고 하자. 이때 다급히 ‘Rilchiam’이라 답한다면, 이 무의미한 단어는 ‘리차드’(Richard) 또는 ‘윌리엄’(William)이라는 두 개의 이름으로 ‘들릴’ 수 있다. 다시 말해 무의미한 ‘Rilchiam’이 분기(分岐)하며, ‘Richard’와 ‘William’이라는 왕의 이름이 각각 들어간 두 개의 가능한 의미망을 형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문학적 말놀이 말고도, 정신분석학 역시 무의미로부터 의미가 출현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무의식은 가장 심층적인 심급으로서, 의식의 형성에 작용한다. 심층의 무의식은 원인이며 표면의 의식은 그로부터 유래하는 결과이다. 무의식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지만, 바로 의식 속에서 그 의식이 인지할 수 있는 의미를 가능하게 한다. 이는 결코 무의식 안에 있는 의미가 의식 안에 있는 의미로 번역되는 것이 아니며, 무의미로부터 의미가 형성되는 것이다.
삶의 가장 중요한 국면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그 중요한 국면이란 누구에게나 ‘타자와 맺는 관계’일 것이다. 삶이란 언제나 타자와의 마주침에서 마주침으로 나가는 기나긴 과정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도 의미의 기원이 되는 무의미를 마주한다. 리오타르는 ‘쟁론’에서,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를 다음처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타자는 어떠한 의미도 알리지 않으며, 그가 바로 알림, 곧 무의미다.”(진태원 역) 타자 자체가 바로 무의미라는 것, 또는 무의미로서 자신을 알려온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삶을 능동적으로 설계해 나가며, 삶에 계속 의미를 부여한다. 자신이 부여하는 의미대로 삶이 순조롭게 흘러가도록 하기 위해 늘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데 타자란 내가 계획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 자기의 계획을 세우고서 내 삶에 갑자기 들이닥치는 자다. 병이나 사고, 신체적 고통과 마찬가지로 타자는 나의 계획은 아랑곳하지 않고 불시에 나의 삶 속에 끼어든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애인, 뜻이 맞지 않는 친구, 말 안 듣는 아이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이 타자는 내가 그에게 기대하거나 부여하려는 의미, 즉 내가 꿈꾸는 관계를 함께하는 애인, 나를 도와주는 친구, 내 뜻대로 잘 자라나는 아이들의 모습을 계속 벗어나면서 내 삶에 들어와 있다. 요컨대 의미를 저버리는 방식으로, 즉 무의미로서 도래하는 것이 타자이다.
그런데 삶이란 바로 타자라는 이 무의미와의 마주침에서 비로소 시작한다. 타자와의 만남의 본질은 무의미에 대한 공부라고 할 수 있으며, 무의미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삶의 의미를 얻어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타자에 대한 이해, 용서, 인내, 사랑, 실망 등등으로 불리는 의미, 고정되어 있지 않고 관계에 따라 계속 변화하는 의미 말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무의미는 하나의 과제이다. 텅 빈 무의미의 구멍을 의미로 채우라는 과제 말이다. 이 무의미의 등장으로 삶은 수수께끼를 맞이하고 답을 구하는 기나긴 수련이 된다. 그러나 삶은 완벽히 무의미를 피할 수 있을까? 무의미의 구멍을 더 이상 채우지 못하게 될 때 인간은 어떻게 될까? 무의미로부터 탈출해야 한다는 의지를 완전히 잃고서 무의미를 힘없이 대면하게 될 때 인간은?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 설명 - 질 들뢰즈 (1925∼1995)
프랑스의 철학자. 차이와 생성의 철학자로 유명하다. 철학을 넘어 수학, 회화, 영화 등 다방면에 걸쳐 영향을 미친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해온 철학사 연구를 종합한 ‘차이와 반복’은 20세기 프랑스 철학의 대표작 중 하나다. 그의 또 다른 저서 ‘의미의 논리’는 루이스 캐럴과 스토아학파를 중심으로 ‘사건’이라는 주제를 탐구한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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