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대 연구팀 ‘강박적 섭식 행동’ 원인 규명
달고 짠 음식 계속 먹은 실험쥐
전기충격에도 강박적 음식섭취
뇌 속 도파민 수용체 작동 안해
인슐린 신호 오류로 ‘폭식 행동’
폭식, 단순한 식습관 문제 아닌
‘보상·충동 조절회로’ 이상 규명
위고비·마운자로와 다른 방식
“비만·섭식장애 새 치료법 제시”
배가 부르더라도 눈앞의 치킨이나 케이크를 거부하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일까. 흔히 달고 짜고 기름진 음식을 먹다 보면 포만감이 느껴지는데도 수저를 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를 ‘강박적 섭식 행동’이라고 하는데, 심화될 경우 약물 중독과 유사한 수준의 뇌 변화를 일으킨다. 말 그대로 음식에 중독되는 것이다. 자극적인 음식을 과하게 먹으면 거식증 같은 섭식장애뿐만 아니라 비만이나 제2형 당뇨병 등 대사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체내에 축적되는 내장지방이 인슐린 저항성을 증가시켜, 인슐린이 정상적으로 분비되는 상태에서도 췌장이 더 많은 인슐린을 만들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강박적 섭식 행동은 대사질환을 유발할 수 있는 위험한 행위로 여겨지나, 막상 그 이유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과연 정말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일까? 그런데 최근 국내 연구진이 이 같은 섭식 행동은 뇌 속 신경신호의 균형이 무너진 결과라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한 입만 더’…뇌 신경신호 문제?=고려대 백자현 생명과학부 교수 연구팀은 최근 국제 학술지 ‘Molecular Psychiatry’에 뇌 속 도파민과 인슐린 신호의 상호작용이 강박적 섭식 행동을 조절한다는 사실을 규명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상자에 든 실험쥐에게 달고 기름진 음식을 얻는 훈련을 시켰다. 실험쥐는 상자 안에서 레버를 눌러 음식을 얻는 방법을 일정 기간 학습한 뒤 다른 상자로 옮겨졌다. 다른 상자도 레버를 누르면 음식을 얻을 수 있는 구조였으나, 동시에 실험쥐의 발에 전기충격을 가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실험쥐는 옮겨진 상자에서 전기충격을 받으면서도 계속해서 레버를 눌러 음식을 획득하는 강박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 실험쥐의 뇌를 들여다본 결과, 연구팀은 편도체 중심핵(CeA) 뉴런 속 도파민 D2 수용체(D2R)가 인슐린 수용체(InsR)의 활성을 돕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도파민 수용체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는 인슐린 신호를 억제하는 단백질 ‘PTP1B’가 나오지 않는다. 그 결과 인슐린 신호가 활성화되고, 대사 등을 조절하는 단백질 ‘Akt’가 분비되면서 강박적 섭식을 억제하는 브레이크로 작동한다. 그러나 편도체 중심핵에서 도파민 수용체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할 경우, PTP1B가 억제되지 않아 인슐린 수용체의 발현이 줄어들고 인슐린 신호가 무너지는 것이다. 즉, 도파민 수용체 고장이 곧 인슐린 신호 오류로 이어져 폭식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다.
이번 성과는 ‘먹고 싶은 충동’을 뇌 신호 차원에서 처음으로 교차 규명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폭식은 단순히 식습관의 문제가 아니라 보상·충동 조절 회로의 이상으로 설명된다. 우울증의 증상 중 섭식장애가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되는데, 우울증이 세로토닌과 도파민 분비를 저하시키며 식욕과 충동조절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번 연구는 도파민과 인슐린이 상호작용한다는 사실을 규명했다는 점에서 이를 설명할 수 있다.
◇비만 치료에 새 전략 열리나= 현재 전 세계 비만 치료제 시장을 휩쓰는 약물은 ‘위고비’(세마글루타이드)와 ‘마운자로’(티르제파타이드)다. 이 약들은 위 배출을 늦추고 포만감을 늘리며, 췌장이 인슐린을 분비하도록 촉진하는 GLP-1 호르몬 경로를 활용한다. 마운자로는 여기에 GIP 수용체 작용까지 더해 체중 감량 효과가 위고비보다 강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들 약물은 어디까지나 호르몬을 통한 ‘배고픔 신호’ 조절에 초점이 있다. 반면 고려대 연구가 제시한 D2R·InsR 경로는 뇌 보상회로 내부에서 충동 자체를 억제하는 메커니즘이다. 즉, ‘덜 배고프게 한다’와 ‘먹고 싶은 충동을 직접 끈다’는 차이가 있는 셈이다. 두 전략은 서로 경쟁적이라기보다, 장기적으로는 보완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이번 연구는 아직 동물실험 단계에 머물러 있으나, 뇌 신호 수준에서 도파민과 인슐린의 상호작용이 섭식 행동을 제어한다는 사실이 확인되며 비만 치료의 새 전략을 제시한 셈이다. 연구를 이끈 백 교수는 “뇌 속 도파민과 인슐린 신호가 맞물려 강박적 섭식을 조절한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밝혀낸 성과”라며 “대사질환뿐 아니라 음식 중독, 섭식장애 등 정신질환을 동시에 겨냥할 수 있는 새로운 치료 전략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체중 정상이어도 ‘임상 비만’?= 한편 또 다른 연구결과에 따르면 실제 대사장애나 일상 기능 저하 등, 비만이 임상적 질환이며 체중지표와 별개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나타났다. 고려대 신민정 바이오시스템의과학부 교수가 미국 하버드대 연구팀과 함께 진행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약 45%는 ‘임상 비만’에 해당하며 이들 중 체질량지수(BMI) 기준으로도 비만에 해당하는 사람은 절반을 좀 넘는 수준이었다.
임상 비만이란 BMI뿐만 아니라 실제 체지방 축적에 따른 대사 장애·장기 손상·일상 기능 저하 등을 반영한 새 분류 체계다. 미국 국민건강영양조사 데이터를 바탕으로 저명한 국제 의학학술지 ‘랜싯 당뇨병·내분비학’의 위원회가 제안했다.
연구팀이 미국 성인 4990명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분석한 결과, BMI 기준 비만율은 43.8%였다. 임상 비만율 역시 44.7%로 비슷한 수치를 보였으나, 두 기준 모두 비만에 해당하는 사람은 25.8%에 불과했다. 즉 BMI상 비만으로 분류된 사람 중 상당수가 실제 임상적 문제는 없었고, 반대로 체중은 정상 범위지만 대사 문제나 장기 손상이 나타난 사례도 적지 않았다는 뜻이다. 또 고령층에선 BMI가 높지 않아도 대사 문제 등 임상 비만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젊은 층에서는 BMI가 높아도 임상적 문제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체중만으로는 실제 위험 수준에 이른 비만 환자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연구팀은 “최근 전 세계적으로 GLP-1 계열 비만 치료제 등 신약 개발이 활발한 가운데, 비만의 새 정의는 실제 치료가 필요한 대상을 보다 정밀하게 가려내는 기준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구혁 기자주요뉴스
시리즈
이슈NOW
기사 추천
- 추천해요 1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